스키어들의 성지, 캐나다 휘슬러 블랙콤 리조트를 가다 (2015)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겨 타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유명한 스키리조트가 하나 있어요. “Whistler Blackcomb”이라는 이름을 가진 캐나다 스키장이죠. 서반구에서 제일 큰 규모의 스키리조트이기도 하고, 2010 밴쿠버 동계 올림픽 개최 당시 스키 관련 종목의 경기들이 열렸던 곳이기도 해요. 지금은 연간 270만 명이 들르고 별장을 가진 사람만 만 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일단 규모 자체가 참 엄청난 곳입니다. 슬로프 사이즈만 해도 대한민국의 송파구와 비슷한 사이즈를 가지고 있어요. 스키장의 표고차(스키하우스에서 꼭대기까지의 거리)는 남산 여섯 개 정도를 세로로 쌓아둔, 엄청난 높이죠(1,560m). 엄청난 사이즈 때문인지 실제로 여기서 가끔 조난당하거나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직접 가 보니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것 같았어요. 2015년 겨울, 저는 그렇게 첫 발을 내딛었었어요.
참고로 국내 스키장인 하이원(640m)과 용평(700m)은 남산 두개 반에서 세개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휘슬러를 가려면 BC-99라는 고속도로를 따라가야 해요. 일부 구간을 지나가다 보면 한쪽은 절벽, 한쪽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멋진 풍경을 가진 고속도로라서 Sea to Sky Highway라는 아름다운 별칭이 붙은 구간이 있는 고속도로지요. 여름철에는 정말 멋진 도로일지 모르겠으나,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험준한 도로로 바뀌어요. 커브도 많고 눈길이라 저속주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거리에 비해서 소요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더라고요. 마치 우리나라 90년대의 영동고속도로(현 대관령 옛길)가 생각나는 그런 도로였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자연보호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 영동고속도로 확장하듯이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고 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운전하기가 많이 어렵더군요. 우리나라 스키장들의 편리한 접근성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어요.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강조했던 부분 중 하나가 접근성이었는데, 왜 그렇게 강조를 했는지 몸소 느끼게 되더군요. 한국에서 스키장을 갈 때는 당연하게 생각한 부분이었는데 말이죠. 거기다가 (경제적 타당성을 논외로 하고) 지금은 고속철도까지 있으니 접근성에 대해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네요.
이곳에 오면 당황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스키장의 규모예요. 처음에 온 순간 도대체 어디로 가서 리프트권을 사야하지.. 라고 고민하기 이전에 대체 어느 지역의 어느 주차장에 차를 대야 하지?라는 의문이 먼저 떠 오르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고 스키장 지도를 받아보는 순간 내가 대체 어디있나.. 를 파악하러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주변을 계속 두리번두리번거려야 합니다. 뭔가 곤돌라가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리프트도 보이는데… 리프트 이름도 보이는데 이 큰 지도 안에서 그 이름을 가진 리프트를 찾으려고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있네요.
그다음은 어디를 가야 하지?라는 질문이 나올 차례죠. 스키장 스케일만큼이나 슬로프도 엄청나게 많이 있어요. 초보자용 슬로프도 수십개나 되고, 이게 슬로프라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어요.
지도가 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용평, 하이원, 무주덕유산리조트의 지도를 읽을 줄 아신다면 길을 잃을정도는 아니었어요. 물론 처음 지도를 펼쳐보면 좀 당황스럽긴 하죠. 근데 시즌권을 끊어도 여기 슬로프들을 다 볼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운 곳이긴 하네요.
그래서 슬로프 중간중간에 보면 지도 표지판이 보이고, 직원들이 대기를 하면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 안내를 해 주기도 하는 곳이에요.
강원도의 스키장들도 눈이 많이 내리곤 하지만, 이 동네는 정말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것 같아요. 강원도의 경우 한번에 수십 센티미터가 내리지만, 이동네 스키장들 같은 경우는 기후 특성상 작게 작게(?) 자주 내리는 일이 많더군요. 기상관측 기록을 보면 보통은 하루에 10cm 미만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태평양 온대우림에 속하는 지역이라 나무, 특히 침엽수가 참 많은데, 그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인 모습을 보니 참 이쁘더라고요. 나무위에 눈이 쌓인 풍경은 강원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서식하는 나무의 품종과 형태가 다르다 보니 새로운 풍경으로 다가왔어요.
규모도 규모지만, 슬로프를 내려가다 보면 참 재미있는 풍경들이 펼쳐지죠. 침엽수림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개울 위 다리를 지나가며, 때로는 옆의 차도를 통해 지나가는 차를 볼 수도 있는, 즐거운 곳이에요.
한편으론 이곳 휘슬러 블랙콤 리조트는 참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스키장들은 관리가 잘 되어있고 안전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슬로프 경계엔 펜스들이 잘 쳐져 있죠.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가 않아요. 펜스는 너무 허술하고, 그나마도 설치가 안 되어있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심지어 스키장 어딘가에는 곰이 서식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또한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고 규모가 커서 눈사태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해요. 그래서 일부 지역은 인위적으로 작은 눈사태를 만들어서 나중에 생길지도 모를 큰 눈사태를 대비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스키장 높은곳에 가서는 인공 눈사태용 폭약을 실어 나르는 와이어나 폭약 관련 시설들을 볼 수 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런 예방활동을 보고 “Avalanche Control”이라 부른다는군요.
여기서 말하는 상급자 슬로프는 우리나라의 상급자 슬로프와 개념이 살짝 다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상급자 슬로프라 하면 경사가 급하고 길게 뻗어있으며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팬스가 튼튼하게 설치된 슬로프를 이야기하지만, 이곳에서의 상급자 슬로프는 경사도 경사지만, 슬로프 사이의 나무를 조심해야 하고 바위랑 절벽도 조심해야 하며, 때로는 길을 잃을수도 있는 “야생"의 슬로프를 뜻하는 것 같았어요.
실제로 상급자 슬로프 여기저기엔 "절벽주의", "나무기둥 주변의 움푹한 지형(tree well) 주의", “표시되지 않은 바위와 절벽이 많으니 조심하시오” 같은 경고 문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요.
아찔한 경험도 했었죠. 그래도 이곳에 왔으면 꼭대기를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에 휘슬러 꼭대기를 올라가서 "Whistler Bowl"이라는 이름의 슬로프를 내려가기 시작했죠. 근데 날씨가 조금 흐려서 시계가 30m 정도밖에 안되었어요. 팬스도 잘 안 설치되어있어서 먼저 내려가는 사람들을 뒤따라 갔죠.
문제는 그분들도 초행길이라 같이 길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5명 정도 되는 조난파티(?)가 구성되었고 팔자에도 없는 생존스키(!!)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져지지도 않은 눈에, 경사는 가파르고 나무와 바위는 조심해야겠고, 우린 숲 속 한가운데 있고… 참 아찔하더군요. 그렇다고 스키를 벗고 내려가기엔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어요. 그전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무릎까지 눈이 올라올 것 같더군요. 결국 스키를 벗지도 못하고 미끄러지듯이 주르륵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같이 헤매기를 한 시간, 결국 슬로프를 발견해서 다 같이 내려오게 되었죠. 다 같이 "해냈어~!"라는 말을 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휘슬러에는 이런일이 종종 일어나나 봐요. 그래서 안내문 한켠에는 “어딜 가는지 일행에게 말하고 다닐 것”, “혼자서 슬로프를 내려오지 말 것” 같은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의례적으로 적는 문구인지 알았는데, 한번 이런 경험을 하고나니 이 말이 얼마나 무섭고 무게가 있는 말인지 체감하게 되더군요.
나중에 휘슬러에 살면서 시즌권을 끊어 자주 오시는 분을 리프트에서 만나서 잠깐 꼭대기 슬로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분도 날씨가 맑을때만 꼭대기에 올라간다고 하시네요.
압도적인 규모와 다양한 슬로프를 만끽하며 즐겁게 보냈던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론 대한민국 스키장의 인프라가 참 좋구나… 라는것을 알게 된 하루였어요. 도로 접근성부터 시작해서 어지간히 있을만한 것들은 다 있거든요. 용평과 하이원은 휘슬러만큼 크고 많은 슬로프가 있지는 않지만 적당한 크기에 다양한 난이도의 슬로프를 부족하지 않은 숫자로 구비하고 있죠. (규모와 자연환경이 다른지라 공평한 비교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무엇보다 안전성과 관리에 있어서는 휘슬러보다 한수 위라고 볼 수 있어요. 다만 한국의 스키장은 좀 야생답지 못한 게 아쉽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리프트 위에서 만난 낯선 행인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한국 스키장의 튼튼한 울타리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물론 외국사람들은 강원도나 한국의 스키장 이름을 말하면 잘 모르죠. 하지만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이후 “2018년 동계올림픽 장소예요”라고 이야기하면 아하~! 하고 알아듣더랍니다.
결국 평생의 소원 중 하나를 성취했군요. 큰돈을 들여서라도 비행기를 타고 건너와서 스키를 타고싶던 동네였는데, 마침 주변상황이 맞아떨어져서 장거리 비행없이 어렵지 않게 다녀왔던 곳이었어요.
스키장의 반의 반이나 구경했을까요? 날씨는 살짝 흐렸지만 참 즐겁고도 신기한 경험을 뒤로한 채 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엔 지인들과 연일권을 끊어서 여러날을 즐겨보아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