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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를 다르게 즐기는 법을 배우다

카빙, 모글, 파크 너머의 다른 세상

by Joon 준모

북미 지역에서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기다 보면 참 많은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스키장의 형태와 기후가 다른만큼 강원도와는 다른 모습으로 설산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죠. 익숙한 듯 다른 듯 적응이 쉽다가도 어떤 면에 있어서는 정말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어요.


정설을 하지 않는곳이 있다고라?

처음에 록키/캐스케이드 지역 스키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제일 적응 안되던 것 중 하나가 정설되지 않은 슬로프 (ungroomed run) 이었었어요. 원래 제 머릿속에 있던 상급자용 슬로프는 용평 레인보우나 하이원 빅토리아처럼 잘 정설된 급사면이었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어지간한 상급자 슬로프들은 그냥 자연설 그대로 놔두더라고요. 오히려 정설작업을 하는 상급자 슬로프가 가뭄에 콩 나듯 있었어요.


정설을 하지 않다 보니 그대로 며칠 내버려 두면 점점 모글(이 지역에서는 "범프" - bump - 라는 명칭으로 불리더군요)이 커져가면서 딱딱해지더군요. 다른말로 하면 점점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기 어려워지는 상태가 되는데, 자연설 범프 처음 보면 정말 쉬워 보이면서도 막상 내려가면 정말 힘들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내려가는데 말이죠.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자연설 범프 타기 (스티븐스패스)


이러한 범프들은 동계올림픽 모글스킹이나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공적으로 조성되는 모글코스와는 다르더라고요. 일정한 패턴대로 딱딱 간격을 맞추어 범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불규칙한 패턴으로 크기도 제각각인 범프가 만들어져서 일반적인 모글스킹과는 또 다른 요령을 익혀야 해서 엄청 고생했어요.

한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처음에 지도만 보고 '상급자 코스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내려갔다가 땀 뻘뻘 흘리면서 혼쭐이 났던 기억이 나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충격흡수(absorb)하는 법이나 라인을 그리는 법도 좀 배워서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던 과정이었습니다. 범프 위에서 타는 방법에 익숙해지니 접근 가능한 슬로프들이 훨씬 많아지고 산 여기저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몇 년 더 삽질 아닌 삽질을 하고나니 이제는 이런 유형의 슬로프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도전과제를 안겨주는 곳이에요.


불규칙한 패턴의 자연설 범프 (파크시티)


눈이 내리는 날이 오면 적설량이 따라 조금식은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슬로프의 형태가 평평해지고 부드러운 눈이 쌓여서 슬로프를 내려가기 좋은 상태가 되어요. 그래서 속칭 "파우더 데이"라고 불리는, 눈이 쌓인 다음날은 사람들이 이때다! 하면서 우르를 스키장으로 몰리죠.

그래서인지 저도 최근 적설량과 슬로프 정설현황(grooming report)을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최근 적설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설이 되지 않은 상급자 슬로프는 노면상태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커서 가능하면 피해 다니곤 해요.


IMG_5254.JPG 보기엔 아름답지가 정설따위 멀리 날아가버린.. 실제로 내려가기는 어려운 슬로프예요 (스티븐스 패스)

소복히 쌓인 눈 위로 몸이 통통 뜨는 느낌의 파우더 스킹

눈이 온 다음날,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하얀 눈을 파우더라고 부르더군요. 스키나 보드를 타고 파우더 위를 지나가는 영상들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멋져요. 파우더라는게 영상이나 사진으로 볼 때는 재미있어 보이지만 막상 실제로 시도해보니깐 생각보다 꽤나 학습장벽이 있는 기술이더라고요. 특히 파우더 입문 초기에 그 퍽퍽한 눈들을 어떻게 뚫고(?) 가야 하는지 너무 막막해했던 기억이 나요. 다른 곳에서 본 표현을 좀 빌리자면 '젖은 천 쪼가리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라 하는데 정말 공감이 되더라고요. 눈 속 깊숙이 들어간 발을 빼는 것도 힘들고 그 속에서 조향을 하는 건 더더욱 힘들었었어요.

정설되지 않은 눈 위를 둥둥 떠다니는듯한 그 느낌, 정말 잊을수가 없어요. (휘슬러블랙콤)


4월의 어느 파우더데이에 잃어버린 스키한 짝, 8월이 되어서야 찾았습니다 (크리스탈마운틴)

더군다나 눈이 쌓이는 날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날이 아닐뿐더러, 주중에 본업이 있는 사람들은 주말에 눈이 내려야만 파우더를 맛볼 수 있죠. 파우더 위에서 스키를 타는 법을 배운다는 건 날씨의 신이 행운을 베풀어야 가능한 일이었었어요. 그렇게 눈이 오는 날을 찾아 파우더 속을 헤매다가 어느순간 스키가 눈 위로 통통 튀어 오르고 있더라고요. 처음 파우더 위에서 제대로 타는 걸 경험한 그 날의 짜릿한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


그러나 이렇게 낭만적일 것만 같은 파우더 데이에도 함정이 있으니... 스키를 타다가 넘어져서 스키와 부츠가 분리되는 경우 분리된 스키가 눈 속에 파묻혀서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농담 아니고 실제로 직접 경험했던 일이에요. 스키 한 짝을 잃어버린 후 부츠만 신은 채로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가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간 후, 눈이 다 녹은 늦봄즈음 고객센터에서 온 연락을 받고 스키를 다시 찾고야 말았던 18-19 시즌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IMG_5579.JPG 파우더데이의 또 다른 함정, 스키를 타고나면 차 위에 쌓여있는 눈을 털어야 합니다 (휘슬러블랙콤)


숲 속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낭만적인 트리런

리프트를 타고 슬로프를 내려가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한쪽은 넓게 뚫린 정설된 슬로프, 다른 한쪽은 숲이 보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귀찮아서(?) 울타리를 안 쳐둔 지역인지 알았는데, 그냥 나무들 사이로 쏙쏙 들어가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산을 관리하는 직원같아 보이지는 않고 놀러온 사람들인데... 하고 생각하다 나중에 "트리런(Tree Run)"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지나가다가 나무에 부딪히면 어쩌지?' 하는 무서움이 있긴 했었는데, 트리런도 트리런 나름이라 입문하시는 분들에게 친절한 슬로프부터 시작해서 점점 난이도가 올라가더군요. 중급 이상 난이도의 슬로프로 가면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슬로프들은 어지간한 스키장에서 다 찾아볼 수 있었어요. 하드코어하게 상급자 난이도로 가면 여기가 슬로프인지 아니면 그냥 야생의 숲 속인지 헷갈릴만한 촘촘한 나무 사이 슬로프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말이에요.


입문하기 좋은 트리런 코스. 적절한 너비에 정설도 잘 되어있어요 (휘슬러블랙콤)

트리런을 좋아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낭만적인 코스이거나 눈 상태가 좋거나. 적당한 폭으로 펼쳐진 안전한 공터를 지나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며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특히 시애틀-밴쿠버 지역의 스키장엔 사철나무들이 많아서 나무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영화 속 같은 멋진 풍경이 펼쳐져요. 그런 하얀 나무들 사이사이 바로 옆을 지나간다고 상상해보세요. 스키를 타러 놀러오는 지인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트리런 코스 몇 군데를 안내해서 지나가면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좀 무섭지만 한번 맛을 보면 계속 나무들 사이만 찾게 되죠 (스티븐스 패스)

많은 상급자 코스는 정설을 하지 않은 상태로 두기 때문에 눈이 내린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가가 슬로프의 설질을 좌우하죠. 그래서 눈이 내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많은 상급자 코스들은 딱딱한 범프들이 많이 형성되지만, 트리런 지역으로 가면 코스 자체의 난이도 때문에 사람들이 눈을 덜 밟고 지나가요. 또한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한번 쌓인 눈이 바람에 다시 날아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어요. 눈이 좋은곳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나무사이를 찾게 되는 거 같네요.


이쯤되면 낭만보단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재미와 좋은눈을 찾는다랄까요? (파크시티)


또 다른 필수 스킬 - 슬로프를 읽는 법

처음 모든것이 익숙하지 않을때엔 '가고싶은 곳 있으면 슬로프 지도 보고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나 실전은 다르더군요. 워낙 광활한 지역이 많고 그 사이를 여기저기 다닐 수 있다보니, 가끔은 가고싶은곳을 찾는데 헤매는 경우가 발생해요. 분명히 지도를 통해서 보거나 아래서 올려다봤을 때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막상 위에서 출발해 그곳을 찾으러 가면 쉽지가 않더라고요. '혹시나 여기일까?' 하고 찾아가 보면 난데없이 절벽이 나온다거나,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가끔은 돌아가기 힘든 급사면을 타고 내려왔는데 예상했던 길이 아니면 좀 당혹스럽죠.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양 옆이 아찔한 지형의 진입로, 본격적으로 슬로프를 내려가기도 전에 길 잃기 참 쉽죠(휘슬러 블랙콤)

길을 찾는 스킬만큼이나 유용한 스킬 중 하나가 바로 슬로프의 상태를 예측하는 법이었어요. 날씨가 변화무쌍한 데다가 정설을 안 하는 지역이 있다보니, 같은 슬로프라도 이날 가면 다르고 저날 가면 달라져요. 거기다가 같은 날이라도 그곳이 그늘진 곳인지, 아니면 바람이 많이 부는곳인지에 따라 눈 상태가 천차만별이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스키장 가는 전날 밤엔 항상 기상정보, 특히 최근 며칠 사이의 적설량/강우량과 기온변화, 그리고 내일의 예상기온이 얼마나 춥고 따듯할지를 체크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네요. 그래도 워낙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인지라, 기상청 수준의 설질 예측 정확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IMG_4321.heic 눈을 읽는법에 대해 많은것을 배웠던 강습 프로그램, "Exteremly Canadian" (휘슬러블랙콤)


스키를 다르게 즐기는 법을 배워가다

강원도에서 한동안 즐기다가 많은것이 익숙해지고 난 후 이렇게 태평양을 넘어 캐스케이드에 도착하니 기후, 식생, 문화가 다른 세상이 펼쳐지네요. 뭐라할까, 제 스키 인생의 2막이 열린듯한 느낌이었어요. 많은 것들이 새롭고, 기초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도 많고 주변 풍경도 낯설고... 스키를 처음 타기 시작했을 때의 그 어색함과 설렘이 다시 찾아온 느낌이었어요.

한편으론 조금 더 빨리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직은 즐길 수 있는 시즌이 많이 남아있으니 열심히 다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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