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서북부지역 태평양 연안(PNW)에 위치한 설원들
개장시기가 비교적 빠른 강원도 스키장과는 달리 북미에 위치한 캐스케이드나 록키산맥의 스키장들은 자연설이 충분히 쌓이기를 기다리다가 오픈하기 때문에 캐스케이드산맥이 위치한 포틀랜드-시애틀-밴쿠버 지역(Pacific Northwest, PNW)의 경우 보통 11월 마지막 주를 기점으로 하나둘씩 개장하기 시작해요. (록키산맥의 경우는 조금 더 일찍 연다고 하네요) 큰 스키장이건 작은 스키장이건 슬로프 면적에 비해 보유하고 있는 정설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후에 의존을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최악의 경우엔 제대로 운영을 못하는 해도 있다 합니다.
반대로 적설량이 상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스키장들이 4월 너머까지 운영을 하더라고요. 휘슬러블랙콤같은 경우는 보통 5월 말까지 운영하고. 정말 높은곳에 위치한 팀버라인은 1년 내내 운영을 한다고 합니다.
용평, 하이원, 휘팍같은 강원도에 있는 스키장을 다닐 때는 보통 스키장 하나를 콕 집어서 한 10월쯤 시즌권을 구매하면 그해 시즌 준비는 끝났죠. 그런데 PNW지역의 스키장들을 와보니 시즌권을 구매하는 문화가 많이 달라서 당황하기도 하고 헤매기도 했어요. 다들 왜 이리 부지런한지, 그리고 스키장들은 뭐가 그리 급한건지 초봄(!!)부터 시즌권을 이미 팔기 시작하더라고요? 헐... 이번 시즌이 가기도 전에 다음 해 시즌권을 이미 팔고 있네요.
거기다가 시즌권 이름도 직관적이지가 않아서 이해하는데 좀 고생했습니다. "XX리조트 시즌패스" 이런 이름을 기대했는데, 무슨 "애픽패스(Epic Pass)", "아이콘 패스(IKON Pass)" 이런 이름들을 가지고 팔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동네는 시즌권을 스키장 단위가 아니라 "프랜차이즈" 단위로 팔더군요. 하나의 프랜차이즈가 여러 스키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해당 프랜차이즈의 시즌권을 구매하면 여러 스키장을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랬죠. (물론 개별 스키장 시즌권도 판매하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가격차이도 그리 크지 않고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프랜차이즈 단위 시즌권을 많이 구매합니다. 심지어 일부 스키장은 프랜차이즈 시즌권이 더 저렴한 현상까지 있어요.)
처음에는 '오, 시즌권 하나로 여러 스키장을 갈 수 있다고라?!' 하면서 좋아했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즌권이 통용되는 다른 스키장을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거나 차로 5-6시간 이상 운전을 해야 하더라고요. 그래도 가끔은 멀리 가서 다른동네 스키장들은 어떻게 생겼나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처음에 스키장을 갔을 때 하마터면 본의 아니게 스키장 바깥으로 나가버릴뻔 했어요. 얇은 막대에다가 줄 하나 걸쳐놓고 "여기가 경계선임"이라는 표식을 해 두더군요. 촘촘하고 두꺼운 주황색 그물(...)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방법으로 경계선을 그려두더군요.
PNW지역의 스키장들을 다녀보면서 계속 느끼는 건, 강원도 스키장들은 울타리 관리의 측면에서 상당히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적어도 강원도 울타리만큼은 이 지역 스키장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것 같아요. 물론 그 배경에는 기후, 지리, 문화적인 차이가 있지만 말이죠.
특히 용평 레인보우같은, 강원도의 스키장에서 당연히 볼 수 있는 슬로프 경계를 따라 울타리가 촘촘히 설치되어있는 풍경은 리조트를 운영하는 측이 시설적인 안전에 대해 얼마나 조심하고 예방에 신경을 쓰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북미의 스키장들을 보면 그물 팬스가 설치되어있는 지역이 드물고 그나마 설치되어있는 팬스도 초급자 슬로프에만 겨우 설치되어있죠. 중급 이상으로 넘어가면 절벽 옆에 기둥 몇 개만 덩그러니 박아둔 풍경을 보고 놀라실 분들이 아마 많을 듯해요.
물론 북미의 스키장이 상대적으로 울타리를 덜 설치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죠. 개인적인 생각으론 일단 스키장 사이즈도 엄청나서 그 많은 스키장의 울타리를 다 관리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설/악천후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바람에 울타리가 눈에 묻히거나 날아갈 수도 있어서이지 않을까 싶네요.
또한 개개인의 책임하에 울타리를 넘어 스키를 탈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것도 한몫하지 않나 싶네요. 보통 "off-piste", "backcountry"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국내에서는 "산악스키"라는 소수의 마니아층이 존재하는 레저이기도 해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위험한(?) 스키장이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이 동네 법이 나름대로 정비되어 있어서라고 하네요. (워싱턴주의 스키 관련 법) 법이라는 것이 복잡해서 모든 내용이나 판례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내용으론 스키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해 스키장 측의 법적 책임이 어느정도 면제, 또는 완화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키장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위험성에 대해 인지를 하면서 본인의 책임하에 이용을 하는 문화적인 면도 있고 말이죠.
아침에 일찌감치 스키장에 도착하면 뭔가 폭약을 터뜨리는 소리가 종종 들리더군요. 특히 눈이온 다음날은 어김없이 펑펑하는 소리가 들려요.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다이너마이트를 눈 위에서 터뜨리는 소리였었어요.
폭설이 자주 내리는 험준한 산간 지역이다 보니 눈사태도 종종 일어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안전한 슬로프를 조성하기 위해 눈이 조금 쌓였다 싶으면 폭약을 이용해 미리미리 인공 눈사태를 일으켜서 큰 눈사태를 예방한다고 합니다. 전문용어로는 "Avalanche Control"이라고 한다는군요.
조금전에 울타리 안전에 대해서 약간의 푸념(?)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눈사태와 관련한 안전만큼은 정말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눈사태를 예방하는 작업은 단순히 폭약을 터뜨리는 작업이 아니라, 산새를 속속들이 잘 알아야 하고, 최근의 기상정보를 분석하며, 매일같이 눈의 상태를 직접 손으로 체크하는 복잡한 작업이더라고요. 그리고 때때로 폭설이 심하게 내리는 날은 헬리콥터(!!)까지 동원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이 지역 스키패트롤은 정말 극한직업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여러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보는 PNW지역의 스키장들은 슬로프를 가로지르며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이지만, 한편으론 자연의 무서움과 위대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해요.
첫번째 휘슬러블랙콤 여정기에서도 적어두었지만, 날이 흐린날 아무런 겁도 없이 정상으로 올라갔었는데 초행길인 데다 짧은 가시거리에 당황해서 길을 잘못 들은 호된 신고식을 치렀죠. 강원도는 보통 나무 주변엔 어김없이 울타리를 설치해 두지만, 이 지역은 숲 속 길도 슬로프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어~?" 하다가 스키장 한가운데 있는 나무로 둘러싸인 숲 속에서 길을 잃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또 다른 한번은 겁도없이 블랙콤 산 꼭대기에 올라갔었는데, 하필 그때 악천후가 시작되어서 눈보라가 마구 몰아치는 거예요. 가시거리가 10미터도 안되어서 (진짜 10미터 떨어지면 사람이 안 보였습니다..) 다들 "시야에서 떨어지지 마!" 하면서 펜스 하나하나 찾아가며 30분을 넘게 해메이며 겨우겨우 내려오다가 산 중턱에 있는 식당하나 찾아서 몸 좀 녹이고 다시 내려가고... 그렇게 고생했던 16-17 시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렇게 몇 번 고생하고 나니 그래도 경험치(?)가 쌓이더군요. 이제는 지리도 좀 알게 되고 어떤 날씨에 어떤 지역을 가면 위험한지 잘 알게 되어서 위험한 상황은 아직까지는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한동안 강원도 스키장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여기저기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재미있어하던 것들도 몇 년이 지나면서 어느순간 익숙해져 버렸네요. 그렇게 하루하루 너무 익숙해진 풍경만 보다가 PNW지역을 살펴보니 많은 것들이 아직 모르는 것들이고 새로웠어요. 용평 레인보우가 열린 후 처음 곤돌라를 타고 올라갈 때의 그 두근두근함이라거나, 하이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스키장이 새로 생겼다고 놀러갔을때의 한껏 들떴었던 그 시기가 떠오르네요.
지금은 스키장 여기저기를 하나하나 들러보면서 캐스케이드의 산들이 얼마나 험하고 아름다운지 탐험을 하고, 눈과 얼음을 이용해 야외에 마련한 바(bar)를 발견하면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한 번에 28명까지 태울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곤돌라도 타 보고, 때때로는 눈보라와 숲 속에 갇히면서 혼쭐도 나는 재미있는 탐험을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