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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하는 관광스키 이야기

핑크직벽을 극복하고 레인보우를 즐기다가 하얀숲속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by Joon 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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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스키를 즐기는 목표와 방향이 "탐험"이었어요. 제가 바라만 보았던 슬로프를 하나하나 진입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그 희열이 정말 엄청나더라고요.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미지의 던전을 들어가 클리어 하는 느낌이랄까요?


스키하우스 앞에서 신는법을 배우고,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익히고, 완만한 사면을 내려가는 법을 깨달은 다음 처음에 옐로우 리프트를 탈 때 느꼈던 그 설레임. 그리고 슬로프 위에서 드디어 인생 첫 런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제어를 못하고 꽈당했던 기억들,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그리고나서 옐로우에 익숙해졌을 때 쯤 핑크 리프트를 처음탈때 느꼈던 두근거림, 그리고 핑크직벽이 처음으로 제 눈앞에 펼쳐진 순간 진짜 낭떠러지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죠. 지금와서 되돌아 보면 뭐가 그리 무서웠나 싶지만, 당시에는 그걸 극복하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ㅋㅋㅋㅋ


WP_000549.jpg (오른쪽 슬로프인 핑크를 처음 올라갔던 그 날,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직벽이라는게 뭔지 몸소 느끼게 되었죠 ㅋㅋㅋ)


WP_000512.jpg (강원도의 끝판왕 슬로프중 하나 빅토리아, 길게 뻗은 시원한 급사면이 레인보우와 닮음꼴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레드 파라다이스를 탐험하러 레드리프트에 처음 몸을 실어볼때도 내가 이렇게 높은곳을 이제는 갈 수 있구나.. 라는 성취감이 있었고


실버 메인을 처음으로 내려오던 날도 잊지 못하는 날 중 하나가 되었죠. 당시에는 많이 어설펐지만 우리나라에서 상징적인 슬로프 중 하나를 내려왔다는 업적(?)을 달성했다는 기쁨이 너무 컸어요.


당시에도, 지금도 칼같은 카빙이냐 숏턴을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탐험이 우선이었던 저에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어요. 일단 어느 슬로프던 크게 긴장하지 않고 원하는 라인을 그리면서 어느 순간이든 제동을 할 수 있구나 라고 느끼면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바뻤죠.


IMG_6156.JPG (처음 레드리프트를 타고 올라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핑크와 그린을 지나 나도 이제 저 높은곳을 갈 수 있구나! 하는 두근거림이 있었죠)

그렇게 빅토리아도, 레인보우도 편하게 원하는 라인을 그리면서 내려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즈음 뭔지 모를 상실감이 찾아오더라고요. 다른말로 현타라고 하는 그것이죠. 게임을 하다 최종보스를 클리어하고 엔드컨텐츠가 없어 방황하는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어요.

WP_000567.jpg (강원도의 실질적 엔드컨텐츠 슬로프죠, 레인보우 1-4)


그러다가 어느날은 비정설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원정을 갔다 겁도없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상급자 슬로프를 들어갔는데 울퉁불퉁한 비정설 범프들에 혼나고 숲속을 해매다가 거의 한시간만에 겨우 빠져나왔던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누가 그러던데요, '나를 파괴시키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 오히려 오랬동안 묵혀두었던 저의 탐험정신에 불을 지피더라고요.


대규모 패치를 만난 게임 캐릭터마냥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도전과제가 주어지니 살아있는 느낌이었어요. 스키장 지도를 보면서 여기는 꼭 탐험하고야 만다! 하는 목표가 생겼고 거기에 맞춰서 다시 강습도 받고, 오후에 형성되는 범프를 열심히 찾아가기도 하고 비정설 탈 줄 아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다시 한단계 한단계 나아갔죠.



IMG_5790.png (비정설 타는법을 익히고 나니 접근할 수 있는 슬로프의 스팩트럼이 정말 넓어지더군요. 그만큼 탐험거리도 늘어났고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어요. 정설차가 다니는 길만 슬로프가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죠. 스키만 신으면 광활한 협곡의 이쪽끝부터 저쪽끝까지 모두 나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고, 스키장엔 슬로프와 펜스 뿐만이 아닌 하얀 나무에 둘러쌓인 낭만적인 슬로프를 탐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스키라는게 잔잔한 파도위의 배처럼 둥둥 뜨기도 하는거구나 하는 새로운 느낌을 배우게 되었어요.


지금은 사방이 탁 트인 새하얀 초원에서 눈을 가르며 내려가다, 눈으로 뒤덮힌 사철나무들이 서 있는 울창한 숲을 지나가고, 산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통나무집을 스키타고 찾아가 핫초코를 즐기는 그런 탐험을 즐기고 있어요.



IMG_4927.png (꼭 난이도만 탐험의 요소일 필요가 있나요, 이렇게 슬로프 속 어딘가 숨겨진 사탕가게 통나무집을 찾아가는것도 탐험이죠)
IMG_4321.png (휘슬러의 Extremely Canadian 스키스쿨. 휘슬러의 고난이도 슬로프를 내려가는 법과 비정설 슬로프의 설질을 유추하는 법을 알려준 강습이었어요)






많은분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계실 거에요. 그것이 품새가 되었던 묘기가 되었던 아니면 저같은 탐험이 되었던, 혼자 유튜브를 보는 독학을 하시던 아니면 강습을 받으시던, 그 "과정" 자체를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우리처럼 취미로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의 특권 아니겠나요. 생계를 압박받지 않으면서 나만의 목표를 세우고 좋아하는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특권 말이에요


누군가 저에게 "엣지를 세울 줄 아시나요?"라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스키를 즐기시나요?"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겠습니다.


모두들 안전하게 스키 즐기시고, 설산위에서 즐거운 추억 쌓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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