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동화_그렇게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만나요.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자르갈이에요. 두 달 전, 파란 뱀의 달 스무 번째 날에 여덟 살이 되었어요. 나는 말을 타고 넓은 초원을 멋지게 달리는 아빠 그리고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늠름한 강아지 술드와 함께 살아요. 아, 그리고 잊으면 안 되죠. 우리 집 양 떼와 말들도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가족이랍니다. 이렇게 함께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넓은 초원이 우리의 집이에요.
내가 사는 곳에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어요. 이른 아침은 부쩍 추워져서 이불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지만 기지개 쭉 켜고 문을 나서면 밤새 풀잎에 맺혔던 이슬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요. 잠에 덜 깬 술드가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며 풀잎 사이를 걸으면, 이슬이 깜짝 놀라 또르르 구르며 떨어지고 게르 옆에서 자던 말들도 어느새 일어나 하품하듯 길게 숨을 내뿜어요.
이렇게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면, 하늘도 초원도 햇살도 매일 새롭게 눈을 뜨는 것만 같아요.
내 이름 자르갈은 ‘행복’이라는 뜻이래요.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 아빠는 너무나 행복해서 자르갈이라는 이름 말고는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대요. 엄마 아빠가 처음으로 아기였던 내 작은 귀에 "자르갈“ 하고 속삭였을 때, 내가 갑자기 팔다리를 흔들며 까르르 웃었다고 해요. 아마 아기였던 나도 그 이름이 좋았나 봐요.
나는 지금도 내 이름이 정말 좋아요. 왜냐하면 아빠는 혼자 있을 때 왠지 자주 슬퍼 보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야생 늑대처럼 가끔 무서운 표정을 짓거든요. 그렇지만 내 이름을 부를 때면 항상 장난기 가득 행복한 표정을 지어요. 그래서 나는 종종 아빠 근처에서 바쁘게 뭘 하는 척하면서, 아빠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곤 해요.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 얼굴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행복한 아빠의 얼굴을 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힐끔힐끔 곁눈질로 아빠를 계속 확인하면서 그냥 앞에서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난로에 넣을 마른풀을 모은다거나 내가 제일 아끼는 분홍색 토끼 컵을 괜히 달그락 거려보고요. 발 앞의 작은 돌을 발로 툭 쳐서 데구루루 굴려본다던가, 일부러 양 떼 사이를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뛰어다녀보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아빠는 어김없이 "자르갈!" 하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내 이름을 크게 불러줘요. 그럼 난 “네, 아빠!” 힘차게 대답하며 쪼르르 달려가면 되는 거예요. 정말 쉽죠? 내가 달려가면 아빠는 활짝 웃으며 하늘 높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주며 비행기를 태워주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가끔은 못 들은 척하기도 하는데 그럼 아빠는 두 번 세 번 내 이름을 더 불러준답니다.
이렇게 아빠랑 함께 있으면 뭐든지 즐겁지만, 가끔은 조금 걱정되기도 해요. 아빠는 이웃집 바타르 아저씨보다 훨씬 키가 크고, 초원을 쿵쿵 울릴 만큼 빠르게 말을 잘 타는데, 왜 어린이인 나에게는 항상 속는 걸까요? 그래서 가끔은 아빠가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살짝 걱정되기도 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똑똑한 내가 항상 아빠 곁에 있으니까요.
언젠가 이웃집 툭싱투리 아저씨가 알려줬는데, 술드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개라고 했어요. 곰처럼 커다란 술드는 반짝이는 검은 털을 가지고 있고 눈 위에는 동그랗고 노란 점이 두 개 있는데, 가끔은 그 노란 점이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반짝이기도 해요. 내 생각에는 그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마법의 눈 같아요.
술드는 이제 조금 늙어서 귀가 잘 안 들린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몰래 과자를 먹을 때만은 꼭 알아차려요. 한 번은 술드가 낮잠을 자는 동안 게르에서 한참 먼 곳에서 과자 봉지를 살짝 뜯었는데, 내가 미처 과자를 입에 넣기도 전에 빠르게 달려왔어요. 아마 술드는 마음을 읽는 능력뿐 아니라 과자 냄새를 잘 맡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술드가 어리고 힘이 센 강아지였을 때는 새벽까지 밖에서 양 떼 곁을 지켰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게르 안에서 함께 자요. 양 떼들이 걱정되는지 밤이면 바깥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코를 킁킁거리며 서성이다가 문 앞에서 잠이 들어요.
술드는 아빠보다 더 크게 코를 골며 자다가도 깊은 밤, 투노라고 불리는 게르의 하늘 창으로 새벽 찬 바람이 불어오면 금세 눈을 뜨고 귀를 펄럭이며 주변을 살펴요. 그리고는 코를 벌름이며 바람이 실어 온 젖은 풀 냄새와 양들이 나지막이 우는 소리를 한참 확인하고 다시 잠이 들어요. 아마 술드는 눈이 반쯤 감겨 있어도 야생 늑대들이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깊은 밤, 멀리서 야생 늑대가 울어도 괜찮아요. 내 곁에는 힘센 아빠와 수호신 같은 술드가 있으니까요.
이곳은 밤이 되면 쏟아질 듯 색색으로 빛나는 별들이 양탄자처럼 하늘 가득 펼쳐져요. 한 번은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봤는데, 큰 별 하나가 빠르게 반짝이며 내 위로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혹시라도 놓칠까 봐 눈을 크게 뜨고 두 손 모아 쭉 내밀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별은 떨어지지 않고 술드가 조용히 다가와 축축하고 큰 혀로 내 손을 핥았어요. 아마 별을 잡지 못한 나를 위로해 주고 싶었나 봐요. 비록 나는 술드 몰래 바지에 여러 번 손을 닦아야 했지만요.
해가 지기 전이면 아빠는 술드와 함께 먼 초원까지 풀을 뜯으러 간 양 떼들을 데리러 가요. 술드와 아빠는 초원의 모든 길을 다 기억하고 있어서, 길을 헤매는 일은 없답니다.
나는 그 사이 집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하다가 수테차를 만들어요. 이제 나는 8살이니까 불을 지피고 찻잎을 우려내고, 우유를 끓이는 일까지 혼자 할 수 있어요. 수테차를 만들 때는 우유가 넘치지 않게 국자로 계속 저어야 해서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요. 아빠는 내가 만든 수테차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거든요.
초원 끝자락에 자리한 산 그림자가 땅에 길게 드리워질 즈음, 우유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저 멀리서 말을 탄 아빠가 양 떼를 몰고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요. 그리고 뒤 이어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술드와 양 떼의 숨결도 섞여 있고 먼 초원의 달콤한 흙냄새도 함께 섞여 있는 것만 같아요.
아빠가 양 떼들을 우리에 넣고 술드와 함께 게르로 들어오면 저녁 시간이에요. 난로에는 장작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아빠가 수테차를 끓이거나 양고기를 굽기 시작하면 나는 아빠를 돕거나 난로에서 올라오는 하얀 연기가 천정 가운데 하늘을 향해 뚫린 둥근 창으로 춤추듯 올라가는 걸 구경하기도 해요.
우유의 고소한 향과 양고기 냄새가 게르 안을 가득 채우고 버터를 넣은 수테차가 주전자에서 몽글몽글 끓으면, 아빠는 토끼가 그려진 내 귀여운 전용 컵에 먼저 차를 담고 소금을 넣어 주어요.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천천히 마시면 버터차의 고소한 향이 온몸 가득 퍼지는 것만 같아서 더 행복해져요.
나는 아빠와 술드와 함께 보내는 이 저녁 시간을 정말 좋아해요. 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보기도 하지만 가끔은 아빠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거든요.
한 번은 깊은 밤, 잠은 오지 않고 너무 심심해서 아빠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어요. 깜박 잠들었던 아빠는 실눈을 뜨고 하품을 하며 내게 어떤 채소장수 아저씨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주 먼 옛날, 어떤 채소장수가 있었는데, 수레에 채소를 한가득 싣고 가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졌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나는 채소장수 아저씨가 너무 걱정됐어요.
“음... 아직도 떨어지고 있단다.”
“지금은요?
“아직도 떨어지고 있단다.”
그러다 그만 모두 솔솔 잠이 들었어요.
“아빠! 그 채소장수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되었어요?”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물었어요.
“아직도 떨어지고 있단다.”
“그 채소장수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다음 날도 너무 긍금해서 다시 물었어요.
“아직도 떨어지고 있단다.”
아빠는 또 똑같이 대답했어요.
“그럼, 지금까지 계속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아빠는 조금 심드렁하게 대답했어요.
“끝도 없는 낭떠러지라서 그렇단다.”
내 생각에 아빠는 가끔 귀찮아서 이야기를 대충 만드는 것 같아요. 궁금해서 또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아빠는 “아직도 떨어지고 있단다.”라고 말할 게 분명해서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서 나는 채소장수 아저씨가 안전하게 내려와 어딘가에서 다시 열심히 채소를 팔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내가 자꾸 물어보니까 아빠는 신이 나 보였어요. 아마도 내가 그 이야기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똑똑한 내가 아빠 곁에 항상 있어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했답니다.
언젠가 아빠에게 엄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아빠 말로는, 엄마는 나를 낳을 때 다른 아줌마들보다 훨씬 오래 걸렸대요.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빠는 웃으며 말했어요. “소중한 것은 언제나 조금 늦게, 그리고 힘들게 찾아오는 법이란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엄마는 먼저 세상을 떠났대요. 그래서 나는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요. 어느 날,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어 엉엉 운 적이 있었는데, 아빠가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어요. “자르갈, 엄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단다.” 나는 깜짝 놀라 아빠를 바라봤어요.
그러자 아빠는 속삭이듯 말했어요. 엄마는 드넓은 초원에 부는 산들바람 속에, 한낮의 따사로운 태양 속에, 밤하늘의 푸른 달빛과 반짝이는 별빛 속에, 하늘을 흘러가는 양털 같은 구름 속에, 여름에 내리는 촉촉한 단비 속에 늘 함께 있다고요. 눈을 감으면, 엄마가 바람과 햇살과 별빛으로 나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 뒤로 나는 엄마가 우리와 늘 함께 한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울지 않아요.
저 멀리 서쪽 하늘에 초승달이 밝게 빛나던 밤이었어요. 이곳 아르항가이의 밤하늘은 마치 지난봄 보았던 짙푸른 외기이 호수처럼 끝도 없이 깊고 맑아요. 푸른 별빛 아래 누워 있으면 마치 우주의 모든 별이 나를 찾아 놀러 온 것만 같아요. 한참 별들과 속삭이며 이야기하는 상상을 하다 보니,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았어요
밖에서는 말들이 푸드덕 숨을 고르는 소리와, 양 떼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어요. 바람의 향기는 시시각각 달라서 이번에 어떤 향이 날까 코를 벌름이며 힘껏 들이마셨어요. 그러자 처음으로 바람에 꽃 향기 같은 향긋한 내음이 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엄마 꿈을 꾼 것 같아요.
게르 천정의 둥근 창으로 갑자기 하얀 별빛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반짝이는 별들이 천천히 길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길 위를 천천히 걸었죠. 별빛으로 이어진 길은 초원의 풀밭 위로 이어져 있었어요.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꽃 향기가 불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 목소리는 내 귓가를 맴돌다 은하수 속으로 사라졌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코끝에 꽃 향기가 남아 있었어요.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져서 조금 슬퍼졌지만 “괜찮아! 우리는 늘 함께 있으니까.” 이렇게 씩씩하게 소리치며 기지개를 쭉 켰어요.
난로에 장작불이 붉게 타오르고, 아빠가 수테차를 끓이기 시작한 그날 저녁, 이웃집 바타르 아저씨가 어떤 예쁜 아줌마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아줌마 옆에는 나보다 조금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나를 보더니 수줍은 듯 아줌마 뒤로 쏙 숨어버렸어요.
그때였어요. 낯선 사람이 오면 언제나 왕왕 짖어대던 술드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 냄새를 킁킁 맡더니 갑자기 껑충껑충 뛰며 꼬리를 마구 흔드는 거예요. 이상했어요. 술드는 원래 낯선 사람을 보면 으르렁거리며 짖는데 말이에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분명 그 아이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게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거든요. 그리고 순간, 어젯밤 꿈에서 맡았던 향기가 바람결에 스치듯 지나갔어요.
“자르갈, 어쩌면 얘는 곧 네 동생이 될 거란다.”
바타르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어요.
나는 놀라 아줌마 뒤에 숨은 아이를 다시 바라보았어요. 가슴은 콩콩 뛰고,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기쁨이 피어올랐어요. 아마 우리 둘은 아주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몰라요.
술드는 지금도 그 아이 곁에서 열심히 왕왕 꼬리를 흔들고 있어요, 마치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요. 시원한 산들바람과 밤하늘의 반짝이는 푸른 달빛, 한여름에 쏟아지는 반가운 소나기처럼, 엄마가 늘 나를 찾아와 주던 그 모든 순간처럼요. 그렇게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