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읽어줄래?] 책덕 직장인의 독후 에세이
뇌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아직 현대 기술로도 뇌의 모든 비밀을 다 풀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몇 가지 추론을 조합하면 뇌의 진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뇌 진화의 목적은 완벽함이 아니라 생존이다. 현대와 같이 도처에서 안전이 보장되는 시대가 아닌 시절에 살던 인류는 전체의 일부만 보고 재빨리 어림짐작으로 판단하여 살아남아야 했을 것이다. 위험한 숲 속에서 곰과 같은 큰 물체를 봤는데 재빨리 도망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곰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물론 그 물체가 곰이 아니라 그림자로 밝혀질 수도 있지만,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순간에 중요한 것은 빨리 판단하고 움직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생존에 최적화된 뇌의 진화는 우리 인류를 지금 전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종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 진화 자체의 목적은 생존이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는 불리한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생존을 위해 어떤 해결책 위에 또 다른 해결책을 덧씌우는 방식을 "클루지"라고 한다. 우리의 뇌 또한 "클루지"이며 이전의 낡은 버전의 기능, 즉 현대에선 크게 실용적이지 못한 기능들까지도 갖고 있어 불합리하거나 비효율적인 판단을 내리곤 한다. 이제부터 이것을 '유전자 오작동'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유전자 오작동은 대표적으로 3가지가 있다. 첫 번째, 평판 오작동. 두 번째, 새로운 경험에 대한 오작동. 마지막으로 손실 회피 편향이 그것이다. 이제 각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1. 평판 오작동
인간관계의 최대 수는 대략 150명 정도라는 가설이 있다. 즉, 우리의 친구 수는 150명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지금처럼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해 있지 않을 때는 많아봐야 150명 정도의 무리로 이루어진 집단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한 규모의 집단 안에서 평판을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판을 잃은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도움을 얻지 못해,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오로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큰 벌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평판에 아주 민감하고 남 이야기에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가진다. 만약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남 욕을 하라. 그러면 아주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수십억 인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숫자가 커져버린 이상 '평판'은 과거의 "클루지"일뿐이다. 평판을 잃는 것에 두려워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한다면 결코 역행자가 될 수 없다. 현대의 우리에게 평판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기억하자.
2. 새로운 경험에 대한 오작동
인간은 새로운 도전을 꺼리도록 진화했다. 즉, 새로운 도전에 대한 거부감이 "클루지"인 것이다. 과거의 인류가 무턱대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검증되지 않은 버섯을 먹는 시도를 했는데 그 버섯이 하필 독버섯이었다면?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다. 혹은 울창한 밀림 속을 해치고 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혈혈단신으로 숲을 지나가기로 시도했다면? 사나운 동물에게 잡아먹히거나 얼마 못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진화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 또한 클루지일 뿐이다. 현대의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죽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 해도 우리는 죽음과 직면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라도 좋으니 일단 한 번이라도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3. 손실 회피 편향
인간은 이득보다는 '손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 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판단할 때 내가 손실을 입지 않도록 판단해왔다. 선사 시대 인류가 어두운 곳에서 뭔가 큰 생물을 봤다면 즉시 재빠르게 도망가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거기서 꾸물거리다가 그 생물이 곰이었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그것이 설령 곰이 아니라 바위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재빨리 피해서 나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서는 손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작은 손실을 감수하면 분명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음에도 우리는 손실이라는 "클루지"때문에 작은 손실조차 회피하려다가 결국 더 큰 손실을 입고 만다. 유전자의 명령에 역행하여 손실에 대해 무시하여야 역행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