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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Jun 18. 2018

1. 엄마 이야기

 변진섭, 홀로 된다는 것(1988.06.15)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항상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그걸로 수많은 노래를 틀어줬다. 동요도 전부 카세트테이프로 배웠다. 목소리로만 아는 아이들의 노래를 나도 같이 따라 불렀다. 아주 밝은 동요도, 아주 쓸쓸한 동요도 있었다. 당시에도 ‘이거 어린이인 내가 듣기엔 지나치게 쓸쓸하지 않아?’ 싶은 그런 노래들이 많았다. 엄마가 동요만 틀어준 건 아니었다. 선곡은 엄마 마음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던 가요들도 많이 들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주 오랫동안 품에 꼭 끌어안아 본 듯이 어렴풋하게나마 또렷한 감촉으로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택시 운전사였던 아부지가 부업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싣고 다니며 장사를 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운전할 때 틀려고 수집해둔 건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 집에는 리어카나 휴게소에서 팔 법한 카세트테이프가 정말 많았는데, 특히 엄마가 자주 트는 테이프가 있었다.


내는 이 노래가 그렇게 좋드라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해~”를 가수처럼, 목청껏,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열창하던 젊은 엄마. 나는 어린 마음에도 이 노래가 너무 쓸쓸했다. 엄마가 부르는 노래도, 노래를 부르는 엄마도 쓸쓸했다. 그 노래가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이었음은 나중에 다 크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가 따라 부르던 목소리는 어떤 여가수가 커버한 버전이었다. 트로트 메들리에 실려 있던 그 목소리는 마치 원곡자처럼, 처음부터 자기 노래였던 것마냥 참 처연하게도 불렀다. 감정이 철철 넘쳐 흘렀다. 어른이 되고 한참 후에야 변진섭 씨 버전을 듣게 된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불러내던 그 목소리에 많이 놀랐었다. ‘홀로 된다는 것’은 처절하고 처연한 여자 목소리가 입혀져야 당연한 거였다. 내게는 ‘희망 사항’으로 기억되던 80년대 청춘 가수의 대표 격이었던 변진섭이 이렇게 쓸쓸한 곡을 불렀다는 게, 그것도 데뷔 앨범에 이런 노래를 실었다는 게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엄마 나이 서른 즈음이었을 것이다. 혹은 서른둘이나 서른셋. 엄마는 딸 셋을 낳았다. 아홉 살 혹은 그보다 더 어렸던 나는 엄마의 구슬픈 허밍을 매일 들었다. 오래 가라고 억세게 만 파마는 어깨선까지 꼬불꼬불하고, 빨래를 돌려놓고 애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카세트에서 나오는 이 노래를 열창하던 엄마는 너무 젊었다. 몸에 나쁘다며 믹스커피도 안 마시던 엄마, 술 담배 커피도 안 하던 엄마는 무엇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을까. 한숨처럼 들리던 엄마의 노래에는 어린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묻어 있었다. 아직 젊은 여자가 열창하기에는 너무나 체념에 가까웠던 곡. 나는 그 노래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냥 그 노래를 부르는 엄마가 많이 슬펐다. 나는 찡그리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표정 없이 가만히 그 슬픔을 듣고 있었다.



자라면서 엄마가 짊어진 수많은 짐을 목격했고, 어린 내겐 어려웠던 그 감정이 회한이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사랑한 엄마를 한 개인으로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혼자가 되고 싶었지만 혼자일 수 없었던 여자. 여전히 이 노래를 다 외우고 있지만, 다시 듣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릴 적 엄마는 방학이나 주말이면 꼭 우리를 낮잠 재웠다. 이젠 클 만큼 커서 잠도 안 오는데 억지로 재우는 통에 누워 있는 것조차 싫었지만, 어쩌다 잠이 들면 저녁 대여섯 시쯤에 깨곤 했다. 어스름이 내려온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뜨면 방문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부엌에서는 달그락달그락 저녁 준비하는 엄마의 소리가 들렸고,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허밍도 자주 함께 들렸다. 낮잠에서 깼을 때의 텅 빈 느낌 속에서 고요히 엄마의 노래를 들으며 그때의 나는 많이 울고 싶었던 것도 같다. 비몽사몽한 느낌이 가신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한동안 방 밖에 나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잦았다. 그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던 걸까.  



많은 시간을 건너온 지금은 엄마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최근 엄마의 카카오스토리 음악은 이하이의 ‘손잡아줘요’다. 시원시원한 창법과 그루브한 텐션의 신나는 곡이다. 2018년의 엄마는 이하이를 듣는다. 삶이 녹록잖았던 젊은 날의 엄마는 그때 그 노래와 함께 가슴 속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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