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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Apr 20. 2018

0. 귀를 기울이면 나지막이

우리 안에 새겨진 노래에 대하여



들으면 한 시절을 소환해오는 노래,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노래가 기억을 불러들이는 감각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은 아니에요. 오히려 소름처럼, 무언가 일제히 돋아나는 느낌에 가깝죠. 학습된 반응이 아니라 반사 신경으로 떠오르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런 노래들은 어떻게 그렇게 깊이, 신경에 달라붙게 된 걸까요? 단순히 특정 시기에 그 노래를 많이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한 시절을 관통한 노래라는 게 반드시 들은 횟수와 비례하지는 않더라고요. 그것보다는 순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언젠가의 지금'이었을 어떤 순간에 그 노래가 꿰인 거죠. 혹은 노래가 순간을 꾀어냈을 수도 있고 말이에요.  



떼려야 뗄 수 없이 한 순간에 유착된 노래들은 청춘의 가장 눈부신 때를 불러오기도 하고, 그냥 이유 없이 잊히지 않는 하루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기억이 아닐 때도 있어요. 예컨대 출렁이는 버스 맨 뒷좌석에서의 어지럼증이라던가, 곧 땀이 날 것 같은 초여름밤의 달큼하고 뭉근한 냄새 같은 것처럼 삶의 어느 장면 속에 있던 감각의 일부가 되살아나기도 해요. 듣는 동안에는 몰라요.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이 노래와 함께 기억되리라는 것을요. 가끔 그럴 때도 있잖아요. 어떤 순간이 너무 특별해서 지금 이 순간이 이 노래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리라고 직감할 때. 하지만 그 직감은 사실 엉터리일 때가 많아서 의외로 나중에 가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기도 하죠. 이처럼 한 시절을 소환해오는 노래는 애써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노래와 순간의 결속력, 기억 속 노래의 휘발성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영화 <코코>를 보면, 쇠약해진 마마 코코가 마지막 남은 기억마저 잃어갈 때쯤 손자 미구엘이 그녀의 귓가에 노래를 불러주잖아요. 어릴 적 아빠가 불러줬던 노래 'Remember me', 그 노래가 마마 코코의 모든 기억을 다시 불러와 줬듯이 추억을 입고 특별해진 노래는 우리 내부 어딘가에 새로운 DNA로 자리 잡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짝사랑 유전자가 발달한 사람, 실연이 많은 사람, 여름에 가장 청춘이었던 사람, 겨울의 온기를 사랑했던 사람은 다 제각각 다른 노래에 반응하는 거겠죠. 파동은 기억뿐만 아니라 몸에도 깊이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몸속에 새로운 음악을 새기며 살아가고 그 음악은 곧 우리의 체질이 돼요. 만약 모든 기억을 잃고도 남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건 저에게도 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내게 오직 나밖에 없었을 때, 그리고 나조차 나를 잃어가고 있을 때에도 항상 노래와 쓰기만큼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때를 견디고, 곱은 손을 겨우 꼼지락거리자면 항상 이어폰과 펜을 먼저 찾게 되더라고요. 마음의 언저리를 더듬는 일, 위로가 되어준 노래. 오랫동안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방법을 못 찾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내게 가장 가까운 위로였던 노래에 대해 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론으로 접근하는 음악 말고, 삶에 닿아 있는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요. 생각해보니 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 리스너로 살아온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겠더라고요. 왜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왔던 걸까요. 소리를 이야기할 가장 가까운 방법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말이죠.   



이제 한 편씩 귀를 기울이면 나지막이 들려올 노래의 기억들을 조곤조곤 불러와 볼 거예요.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시간만큼 멀어지면 상실은 흐려지기 마련이라고 믿습니다. 선명하게 남은 낙원의 순간만을 발췌할 수 있기를. 마치 이 노래의 가사처럼요.


귀를 기울이면
나지막이 재잘대던 모습 그대로
내 곁에 앉아 있을 것 같은
눈을 감으면
고요히 잠든 그 모습 그대로
내 품에 안겨 있을 것 같은

- 9와 숫자들, 실낙원(2009)



연두를 보며 초록을 예감하는 계절, 다가올 여름에는 눈부신 나날을 소환해오는 그런 곡들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우리의 지금은 또 어떤 음악으로 기억될까요? 싱그러운 기억을 덧입은 노래들이 새롭게 나의 일부가 되길 바라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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