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생활 산문 「호수(戶數, 湖水)」
물이 괸 호수 湖水 에 작은 돌을 던지면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그리고 사람이 괴어 사는 각 방의 호수 戶數 에서도 삶이 파문을 만들어낸다. 이곳저곳 호수 戶數 속에 괴어 산 지도 어느덧 십여 년. 나 역시 호수마다 파장이 다른 생활을 일궈갔고 생활은 삶에 여러 물결무늬를 남겼다. 또 한 번의 이사를 앞둔 지금, 길었던 한 시절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자취 생활을 돌아보고 싶었다. 자취 自炊 생활의 자취를 뒤적이며 건져낸 호수 戶數 속의 호수 湖水 같은 시간들. 지금부터 쓰는 글들은 그간 내가 살아낸 호수 戶數 에 얽힌 이야기다.
거쳐온 방을 이야기로 엮을 생각은 2015년에 처음 했다. 생각을 글로 구체화하기까지 간헐적인 씀과 잦은 공백기가 있었다. 옛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볼까’ 싶으면 어딘가에 짧게 적어두는 식이었다. 거기다 기억을 덧붙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까진 하지 말아야지’ 싶은 건 지우기도 했다. 현생이 고달플 때는 몇 달이고 방치하기도 했다. 항상 일기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기록들을 홀로 계속해왔지만, 왜 가장 먼저 호수 戶數 얘기를 엮고 싶어한 것인지는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조금씩 쓰면서 그 이유를 알아갔다. 호수가 붙은 방에는 ‘나’라는 서사가 통으로 얽혀 있었고, 나의 서사는 곧 누구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내 서사의 발굴자였다.
스물두 살 때까지 자기 방을 가져본 적 없던 사람이 고시원에 살며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한 번 집 밖에서 자기 방을 가져본 그는 다시 전처럼 본가에서 지낼 수가 없었고, 마침내 작은 원룸에서 독립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세 번째 고시원을 제집 삼아 서울에서 첫 직장을 다녔고, 언제쯤 고시원을 벗어날 수 있을지 초조해하며 기다렸다. 고시원을 떠나 친구와 함께 살기도 했고, 몇 년간 경기도민으로 살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이사 온 지금은 주거 불안 없는 생활을 고민하며 살고 있다. ‘거주’를 테마로 요약한 13년의 서사는 대략 이렇다.
30대인 지금의 내 모습이 막연히 꿈꾸던 것과는 아주 다르듯, 매번 이사할 때마다 어떤 집을 찾아낼지 역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집을 거점으로 삼은 나는 삶에 익숙해지고 낯설어지기를 반복했다. 집을 옮길 때마다 매일 보는 풍경, 매일 다니는 동선의 기본값이 설계되었고, 집의 평수에 맞춰 품거나 버릴 물건을 결정해야 했다. 생활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머무름을 뜻하는 ‘거주’는 꼬물대는 생활을 내포한 활동 명사일지도 모른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곳. 집이라기보다는 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은 공간. 자취한 호수에서의 경험들로 나는 달라져갔고, 달라진 나는 내 삶에 변곡선을 삐뚤빼뚤 그려나갔다. 비록 어릴 때 꿈꾸던 어른의 모습과는 다를지 몰라도 나는 그 변곡선이 꽤 마음에 든다.
개인의 기록은 가장 작은 단위의 미시사다. 호수 戶數 속에는 들여다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얘기들이 있다. 나 자신의 과거를 서랍 속에 잘 개켜 넣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지만, 몇 년에 한 번씩 호수를 바꾸며 사는 사람들, 이웃 중 누구와도 왕래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방에만 기거하는 사람들에게 와닿는 지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감사할 것 같다. 이어질 첫 글은 처음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 전의 기억, 최초의 집에 대한 이야기다.
*2020년 3월에 나온 1인 가구 에세이집 《삶이 고이는 방, 호수》에 수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