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같은 주제인 양면성
내가 인간의 양면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데미안을 읽고 나서다. 헤세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내 인생에 일종의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는데 어린 시절 접했던 데미안은 '두 개의 세계'에 대해 내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고 그 영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에 읽은 책은 고전이라면 참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오래전 이 책을 읽을 때 같이 있던 책이 스탕달의 '적과 흑'이었는데 A와 B라는 제목 형식이 두 권이 유사해서인지 제법 흥미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두 권 중에 내게 좀 더 자극적이었던 책은 '적과 흑'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베개로 써도 좋을만한 두께의 죄와 벌을 다시 읽었다.
죄와 벌이라는 어쩌면 두 개의 양립하는 단어의 나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내 기준에서 생각하면 반드시 양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 문제는 차치하고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아마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 전체를 읽지는 못했어도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은 대충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제목에서 시사점을 얻어 누군가 죄를 짓고 벌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나폴레옹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었는데 왜 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 하나를 죽인 것으로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하나"라는 문장을 기억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보는 죄와 벌의 주제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숙고라던가 신으로의 귀환 혹은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논평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는 앞서도 적은 데미안과 두 개의 세계의 영향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적어도 내 기준에서는)인 라스꼴리니코프와 쏘냐 모두 두 개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세계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대학 중퇴자에서 살인자로 쏘냐가 여염집 처녀에서 창녀로 그 신분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바로 1분 전만 해도 대학 중퇴자와 숙녀였던 존재가 살인자와 창녀로 변하지만 그들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살인자가 되었건 창녀가 되었건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물론 여기에 1분 전의 나와 1분 후의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해석(상당히 유효한 해석이지만)을 붙일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대학생에서 살인자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누구나 양가집 규수에서 창녀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분의 파격적인 변화도 아니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의 양식이 순간적으로 변할 것일 뿐인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해석하면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은 제법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신으로의 귀환 역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큰 무리는 없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질 수 있는 변화의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나 라스꼴리니코프의 심리 변화의 모습을 보면 무척 흥미진진하다. 결국은 동일한 존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의 모습이 존재하는가...
제 아무리 고상한 척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구석에서는 음탕한 범죄의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고 지독하게 처절한 운명 속에서 고통의 날들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천상에서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껍질에 갇힌 현실의 모습이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뿐이다.
한 가지 기존의 많은 감상들과 엇갈린 내 생각 하나를 더 말하자면 주인공이 결국은 신의 품으로 귀의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겉으로 보이는 주제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쏘냐의 애정이라는 것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아마 작가와도 상충되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데 적어도 앞서 언급한 내 기준에서는 양가집 규수나 창녀는 본질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한 신분인 쏘냐에게 고결한 성품이 내재해 있다는 식의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전도유망한 숙녀가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창녀가 되었다고 해서 이 아가씨의 근본이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모범 가장으로 소문난 김 과장이 어느 날 갑자기 묻지 마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의 근본이 달라진 것일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이 말을 우리는 책임질 수 있을까? 아니 감당할 수 있을까?
양면성은 사실 하나라는 의미고 다름 아님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2009년 4월 14일에 첫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