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 작가님과 하는 글쓰기 수업, 감정 하나를 그리듯 표현하기
그네가 흔들리다가 삐이익하며 서서히 멈췄다. 발로 툭 모래를 찼다. 아까 나왔을 때는 밝았는데, 지금은 붉은 노을이 땅으로도 번지고 있다. 손끝이 차가웠다. 입으로 호 하고 따뜻한 바람을 손으로 내뱉으니 손에서 쇠냄새가 났다. 그네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 보다.
동네 놀이터에 혼자 있다. 아까는 꼬맹이들이 시끄럽게 우르르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다가, 나에게 와서 "누나는 왜 계속 그네 타?"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가버렸다. 모르는 척 계속 그네에 앉아있다. 하늘을 보니 어두워지고 있다. 놀이터가 그네 삐걱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내가 집에 없는 걸 모르나, 왜 찾으러 오지 않지? 속으로 투덜거린다.
놀이터와 길 사이에 나무가 있다. 그 나무에서 붉게 단풍이 들어 하나 둘 떨어진다. 그 떨어지는 단풍 하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떴는데, 서늘한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엄마는 왜 찾으러 오지 않지? 이제 집으로 가봐야 하나. 엄마가 감을 따서 윤희네 주라고 심부름 보내서 다녀왔더니 집에 맛있는 기름 냄새가 났다. 반가운 마음에 식탁에 앉으니, 돈가스를 민이가 다 먹었다고 남은 게 없다며 나는 주지 않았다. 남동생 민이 입술이 붉게 번지르르하다.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심부름 갔다 왔는데, 그 새 민이만. 돈가스가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다가 목이 매여서, 숟가락을 휙 던졌다. 숟가락이 땡그랑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안 먹어. 엄마는 민이밖에 모르지?"
혼날까 봐 도망치듯 나왔는데, 점심도 먹지 않고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배가 찌르는 듯 아프다. 동네를 걸어 다니다가 집에는 갈 수 없고 다리도 아파 그네에 앉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없어져야 해. 그럼 민이랑 아빠랑 엄마랑 잘 살겠지. 내가 없어질 거야. 투둑. 눈앞이 뿌얘진다. 그네가 삐걱거리며 멈추었으나 단풍을 떨어뜨리던 스산한 바람이 볼로 스쳐 눈물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드르르릉 부우우웅 놀이터 옆으로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훅 맛있는 냄새가 스친다.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지고, 단풍이 또 털썩 떨어진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등 뒤로 그림자들이 따라붙는 것 같다. 집에 있으면 따뜻한 내 방에서 책을 보거나 거실에서 티브이를 볼 텐데, 엄마 때문이야. 나만 미워해. 발걸음은 무겁고, 그림자는 점점 길어진다. 볼은 차갑고, 목덜미가 서늘하다. 집 앞이다.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편안하고 따뜻하다. 내가 없어도 된다 이거지. 불끈 주먹을 쥔다. 들어가야 따뜻한 내 방으로 갈 수 있는데, 거실을 거쳐가야 한다. 티브이에서 도란도란 모여 앉아 같이 보던 오락프로그램 사회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엄마, 아빠, 민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훅 다시 눈물이 흐르고, 어깨가 떨린다. 내 방으로 가고 싶다. 문을 잠그고 혼자 있고 싶다. 이 집에 나는 없어도 되니까, 나는 혼자 있고 싶다. 그때, 웃음소리가 그치고 엄마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뒷이야기]
"연이니?"
엄마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문으로 따라 나왔다.
"누나~"
민이가 소리치며 뛰어왔다.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아빠가 식탁에 앉으며 말하신다.
"연이 손 씻고 와서 앉아라, 여보 따뜻한 물 좀 줘."
나는 아빠 말대로 욕실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본다. 거울의 나는 꼬질꼬질하다. 세수를 한다. 식탁으로 가니 아빠가 상자를 연다. 치킨 향이 집을 가득 채우는 듯 하다. 아빠가 주는 따뜻한 물을 마시자 몸의 냉기가 사라졌다. 물잔을 감싼 손이 따뜻하고, 몸이 더워졌다.
"연아, 미안해. 민이가 다 먹은 지 미처 몰랐어."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다.
"치."
"누나, 치킨 먹자. 기다렸어."
"응."
길게 말하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짧게 대답한다. 아빠가 말한다.
"민아, 가족은 나눠 먹는 거야. 배고프다고 먼저 먹었으면 누나 몫은 남겨둬야지."
민이가 입을 삐죽이다 아빠의 눈초리에 마지못해 대답한다.
"네."
"먹자."
아빠가 내 앞으로 다리를 놓으며 말하신다.
11월 9일 정윤 작가님 피드백 읽고 소리 추가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