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화면 조정의 시간

by 설애

봄을 맞기 위해서는 화면 조정 시간이 필요하다. 빨강, 초록, 파랑과 노랑, 하늘, 분홍 그리고 하양. 입대한 무지개처럼 색들이 서있는 화면을 응시하며 눈을 깨워야 한다. 겨울의 동면 같은 시간을 끝내고 몸을 갑자기 움직이는 것이 무리인 것처럼, 눈에도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하얀 막을 걷어낸 후, 돋아나고 피어나는 색색의 물결을 받아내야 하니까.


봄은 색으로 온다. 여름은 바다의 출렁임으로, 가을은 해의 기울기로, 겨울은 눈의 침략으로 오고, 봄은 꽃의 일렁임으로 온다. 노란 산수유, 개나리, 프리지아, 하늘하늘한 벚꽃, 뽀얀 피부의 백목련, 멋부린 자목련, 산과 마음을 같이 불태우는 진달래와 철쭉, 그렇게 전국에서 숨가쁘게 꽃이 피고 색을 바꾼다. 하얗게 눈 덮힌 겨울이 지겹다는 태세다. 꽃들만이 색을 뽐내는 게 아니다. 이 꽃들 곁에서 은근하게 잎들이 파릇파릇하게 올라와 푸릇푸릇하게 자라난다.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봄은 다시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하나 커진 숫자를 달고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선생님과 시작하는 아이들도 마음 속에서 화면 조정을 해가며 적응하느라 바쁠 것이다. 아이들은 피어나는 꽃같이 화사하고 찬란하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 속에서도 응원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 설레는 마음과 대견한 마음이 흩어지고 겹쳐진다.


마흔이 넘게 봄을 맞이하고 있는 나는,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회사원에게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저 새로운 자루가 생겨 그 자루를 채워야하는 부담감에 가까운 마음이다. 흑백 화면 같은 일상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 채운 봄, 컬러 화면이 쑥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이기도 하고, 물색없이 설레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꽃들 앞에서 선 나는 화무백일홍이라는 무자비한 말을 떠올린다. 이 봄도, 이 꽃도 지나갈 것이다. 화면이 지지직하고 잠깐 사라진다. 다시 봄이, 꽃들이, 아이들이 떠오른다. 따뜻하게 보낸 봄의 시간이 살아나 재방송된다. 살아난 컬러 화면, 봄마다 다시 방영될 오늘의 장면들.


겨울을 밀어내는 봄처럼, 흑백의 일상에 색을 입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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