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아이가 나에게 준 세 가지 선물
버스에서 만난 아이가 내게 세 가지 선물을 주었다. 덕분에 어릴 때 쓰던 초록색 일기장이 마음속에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초록색 표지의 '새 모습 생활일기' 노트에 일기를 썼다. 선생님이 '오늘의 착한 일'을 쓰라고 하셔서 동생을 돌봐준 일, 버스에서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했던 일, 아버지의 구두를 닦은 일 등을 자주 썼다. 특별히 길에서 손수레를 끌고 가는 아저씨를 뒤편에서 친구들과 함께 밀어드렸던 날의 일기가 기억에 남는다. 작은 손으로 힘을 모아 도와드리고 뿌듯해했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좋은 일을 하게 되면, 일기에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다 보니 타인의 도움을 받은 일도 많았다. 특히 우리 딸이 어렸을 때 아이와 둘이 외출하면 자리 양보를 받았거나 배려를 받았던 고마운 기억들이 많다. 항상 그 고마움을 간직하고 나름대로 나누려고 노력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오늘 그 고마움을 갚을 기회가 왔다.
KTX 기차역 근처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앉아있는데 버스 복도로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혼자 걸어서 내 자리를 지나쳐갔다. 놀라서 보호자가 어디 있나 살펴보니, 아이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커다란 짐 여러 개를 힘겹게 들고 버스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가방을 챙기랴 아이를 챙기랴, 이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분주하게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버스가 곧 출발했다. 아이는 귀여운 목소리로 짹짹짹 노래도 부르고 엄마에게 삐약삐약 이야기도 했다.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연신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퇴근으로 지친 버스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음악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했으므로 오늘은 이어폰이 필요 없었다.
30분 정도 지나 버스가 역에 도착하여 멈추자마자 나는 얼른 앞 쪽의 아이 엄마에게 다가가서 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아이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맙다며 가벼운 짐가방 하나를 맡겼다. 나는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얼굴에 다정한 엄마 미소를 가득 지으면서 아이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안녕! 이모랑 같이 내리자~"
아이는 약간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다행히 내 손을 꼭 잡았다.
작고 여린 손이 내 손에 닿자마자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아이고, 예쁘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큰 가방 두 개를 든 아이 엄마는 먼저 내렸고, 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계단을 콩콩 잘도 내려갔다.
"다 왔다~ 이제 엄마한테 가자!" 하면서 손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바라보면서 두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잠시동안 바라보더니, 다시 나에게 손을 내밀고 다가오면서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하여 다시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 엄마도 옆에서 달래주어 아이는 곧 진정되었고 서로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하루 종일 마음의 여운이 많이 남았다.
브런치 작가도 되었으니 '오늘의 착한 일'을 일기처럼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상황을 써 내려가면서 그 일이 그저 단순한 오늘의 착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다는 건가?
그 마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날 마무리 하지 못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것 같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나는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착한 일 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착한 일이라고 하기엔 더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이가 버스에서 내릴 때 다치지 않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 맞다. 그동안 모르는 이들로부터 받았던 고마움을 갚고 싶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에 가장 감동적으로 남았던 것은 아이가 울면서 다시 내 손을 잡으러 오던 그 장면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이 다시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에게 뭔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이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세 가지나.
첫번째로 아이는 버스 안에서 나에게 짹짹거리고 삐약거리며 거기에 있어준 것 자체로 행복한 시간을 선물했다. 두번째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을 잡고 싶은 나의 사심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낯선 나를 믿고 손을 내밀어 잡아 주었다. 세번째 가장 귀한 선물은 '마음'이었다. 아이는 나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어했다. 나의 눈에서 진심을 알아보고 나에게 마음을 준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글은 단지 착한 일을 기록한 글이 아니라, 처음 만난 아이와 깊은 마음을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머릿속이 개운하고 맑아지며, 마음속이 따뜻하고 포근해졌다. 어린 시절의 내가 손수레를 밀었던 일이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유는, 밀어드린 행동 자체보다 뿌듯했던 마음 때문이다. 그 날 작은 아이가 나에게 준 세 가지 선물도 아마 내 마음 속 초록색 일기장에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