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속의 벗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by 눈별숲

"언니~ 오늘 저 언니 연구소 근처에 가면 5시쯤 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후배 M선생님이 카톡을 보냈다.


M선생님은 삼 년 전 여름, 세미나의 강연자로 함께 참여하여 처음 알게 되었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여서 강연자는 학교에서 강의하고, 대학원생들은 온라인으로 수강하기로 했다. 강연 주제는 '상징'으로 나는 문학, 미술, 음악에 숨겨진 예술의 상징에 대한 내용을, M선생님은 모래놀이치료의 상징에 대한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세미나 당일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예상했던 대로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38도가 넘는 고열을 견디며 온라인으로 간신히 발표했다. 약기운으로 혼미한 가운데 화면을 끄고 누워서 강의를 듣는데, M선생님이 '모래놀이치료와 상징'을 강의하는 내용이 귀에 쏙 들어왔다. 예전에 모래놀이치료를 공부해보고 싶었던, 잊고 있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날 저녁, 신기하게도 M선생님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였다.

편지에는 정중한 첫 인사와 함께 그날 만나지 못한 아쉬움, 내 코로나 증상에 대한 염려와 위로가 담긴 다정한 문장들로 가득했다.


"... 심리치료를 하면 할수록 모호해지는 것 같아 막막하기도 한데, 오늘 시간이, 안갯속에서 내 바로 앞 한 발짝 쯤은 보이게 해주는 느낌이라 무척 좋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지식으로 처리하려 했던 것, 머리로 외우려했던 것, 대충 한 가지 색으로만 뭉뚱그려 느끼고 있던 것을, 이제는 프리즘으로 빛을 비춰서 색을 구분해 낸 걸 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재미있어하는 주제를 이야기한 것뿐인데, 내 강의가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기뻤다. 아픈 와중에 이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았고, 격리하고 있는 더운 방에서 고열로 고생하던 나에게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같았다. 어려운 선배일수도 있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의 마음속의 안개를 솔직히 보여준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나는 답장을 썼다.


"심리치료는 저도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 안갯속의 막막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진정으로 내담자에게 배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임할 수 있으니까요."


M선생님에게 하는 이야기는 그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상담자인 나에게 하는 격려이기도 했다.

편지를 쓰면서 내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우리는 마치 예전에 친구들과 그랬던 것처럼 여러 번 편지를 주고 받았다.


마침 한 달 뒤에 우리 합창단의 공연이 있어서 초대했고, 공연날 처음으로 만나 쑥스럽게 인사를 했다.

M선생님은 직접 만든 엽서에 손글씨로 쓴 축하글과 도라 칼프의 모래놀이치료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책이었지만, 선물 받은 책은 매우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밖에는 소나기가 '쏴아~' 내리고 있다. 나는 건물 안에서 밖을 보고 있다가 무섭게 쏟아지는 빗속을 어디론가 뛰어간다. 멀리 서 있던 M선생님이 "선배님~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하면서 방향을 가리켜주었다. 합창연습을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공휴일이라 합창연습이 없다고 한다.



당시 갱년기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느라 소진되어 있었다.

여러 면에서 쉽지 않은 삶의 전환기였다.

안식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차에 이 꿈이 나의 삶의 길을 인도해 주었다.

'이쪽' 이란 M선생님 쪽이다. 안개 속을 신중하게 한걸음씩 나아가듯 심리치료를 하는 쪽.

합창단 활동도 재미있었으나 나의 주된 직업 정체성은 여전히 심리학자였다.


나는 안식년 동안 모래놀이치료를 공부해보자고 결심했다.

은퇴하시는 교수님의 마지막 교육과정에 운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1년 간의 교육과정을 마쳤고, 그 이듬해에 놀이치료실을 개원하여 지금까지 아이들과 부모들의 마음을 돌보며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그날 저녁, M선생님은 여행가서 내 취향을 고려하여 세심하게 고른 선물들을 들고 왔다. 나는 미리 사두었던 케이크를 선물했다. 우리는 삶의 어려움을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벗을 만난 즐거움을 누렸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삼 년 전에 꾸었던 그 꿈이 내 마음에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꿈에서 쏟아지던 소나기는 그쳤고,

지금 나는 가을의 따스한 햇빛을 맞으며 단풍이 절정인 길을 여유롭게 걸어 가고 있다.


눈별 그림, 벗이 인도한 삶의 길


인연이란 참 신비롭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내 삶 가운데 등장하여 벗이 되고, 나의 삶의 길을 인도하기도 한다.


나는 내 삶의 방향이 오래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연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 길을 가기 위해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가방 안에서 M선생님이 선물로 준 마카다미아가 끄덕이듯 작게 달그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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