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여행

평생 마음에 남는 곳

by 눈별숲

지인에게 여행을 간다고 하니 말했다.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덕담이었지만 순간 그 말이 매우 낯설게 들렸다.

어떤 날씨가 '좋은' 날씨일까.

대개 맑은 날씨를 좋은 날씨라고 하는데, 그러면 맑지 않은 날씨는 '나쁜' 날씨일까.


제주에 강의가 있어 7년 동안 자주 여행을 가다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제주의 날씨가 예측할 수 없고 자주 바뀐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니 놀라웠다. 갑자기 세찬 비가 와서 우산이 부러지고 몸의 절반이 쫄딱 젖는 일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한 번은 화창한 날씨에 한라산 둘레를 차로 달리고 있었는데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바로 앞 쪽은 해가 반짝 떠 있어 조금만 가면 비가 그칠 줄 알았다. 하지만 20-30분이 지나도 계속 비가 내렸다. 비구름이 우리 차를 따라오며 세차를 해주고 있었다.


태풍을 만난 적도 있었다.

직접 겪어본 태풍은 정말 무서웠다. 밤새도록 바람이 유리창을 때려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통창 유리가 깨질 것을 대비해 창문과 먼쪽 거실 한가운데 이불을 가져가서 아이를 끌어안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지만, 키 큰 야자나무가 부러져있고, 신호등이 부서져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들이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소낙눈이 와도 좋은 추억이 되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일어날까 봐 두렵지만, 막상 겪어보면 또 다를 때가 많다.


지난 겨울에 딸과 둘이 간 도쿄 여행에서도 그랬다.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 도쿄 국립박물관에 갔는데 마침 전시를 하지 않아 다른 미술관에 찾아갔다. 밖에 나오니 어두워졌다. 다리도 아프고 춥고 배고픈데 주택가 한복판이라 편의점도 없고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캄캄한 골목길을 걸으며 좀 무서웠다.


20분 남짓 걸어서 겨우 찾아낸 식당에는 자리가 없어서 노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 추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실망한채 의자에 앉았는데, 테이블이 코타츠처럼 되어 있었다!

우리는 펼쳐진 전기담요를 모아 끌어안고 환호했다.


직원이 따뜻한 물수건과 일본어 손글씨 메뉴판을 가져왔다. 영어도 안통하고 번역기가 손글씨를 읽지 못해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주문을 했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우유가 나왔다. 우리는 얼음 우유를 마시고 덜덜 떨면서 깔깔 웃었다.

그렇게 즐겁게 음식을 먹었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유명한 맛집과 관광지를 다녔을 때보다 그때가 더 기억에 남는다.


좋은 날씨란 따로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며칠 지나, 꿈을 꾸었다.


여러 명의 여성들이 함께 여행을 갔다. 여행 계획에 '허짜이'라는 곳이 있었다. 우리가 허짜이에 간다고 하니까 가이드인 남성은 난색을 표하며 얼버무렸다.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북동쪽으로 차로 조금만 가면 되는 것 같은데 가기 싫은가? 왜 그러지?


동행들을 모아 그곳에 갈지 말지 회의를 했다. 작곡가인 K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신중하게 생각하더니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가이드의 곤란해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냥 가지 말까.


그때, 의사인 친구 P는 큰 소리로 '아~ 허짜이!!' 하고는, 지인이 다녀왔는데 일본식 전통 밭이 너무 좋았다며 꼭 가고 싶다고 했다. 일본식 전통 밭이라고? 마음이 확 끌렸다.


제주처럼 검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의 이미지가 보인다. 돌에는 이끼가 끼어있고 검은흙으로 된 밭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저 밭에 가보고 싶다. '가보면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여행은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꿈은 끝난다.


허짜이는 재미있게도 지난 치앙마이 여행에서 편하게 지냈던 '허'로 시작하는 호텔이름과 우리가 갔던 유기농 농산물과 감성 소품들을 파는 시장인 '찡짜이 마켓'이 합쳐진 이름인 것 같다. 좋았던 기억이 있는 곳들의 이름이라 그곳 역시 좋은 곳일 것 같다.


신기한 이름의 허짜이는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꿈에 이어 조금 더 깊이 상상을 해보았다.


먼저 가이드가 꺼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물어보았다. 가이드는 꿈에서처럼 곤란해하면서 가는 길에 '도적떼'를 만날 수 있어 위험하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 P선생에게 지인은 어떻게 갔냐고 물으니 비행기를 타고 갔다고 했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겠지만 그 방법이 안전하겠다.


많은 돈을 내고 갈 만큼 좋은 곳이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자기는 여기 살고 있으니 잘 모르겠지만 처음 가본 사람들은 좋아하더라고 한다. 그곳에는 특별한 점이 있어, 한 번 보면 그게 마음에 평생 남는다고 한다.


가보면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가보기로 결심했다. P선생과 다른 여성 한 명, 나 포함 세 명이 가기로 했다. K선생님은 지금 휴직 중이라 비용이 부담되어 못 가겠다고 하며 아쉬워하였다. 내가 다녀와보고 좋은지 알려줄 테니 좋으면 다음에 다시 같이 가면 된다고 위로해 주었다.


허짜이가 어떤 곳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날아오르자 아래의 풍경이 점점 작아졌다. 옆에는 의사도 있어 안심이 된다.


그렇게 허짜이에 도착했다.

일본의 전통밭은 꿈에서 본 것처럼 초록색 이끼가 낀 검은 돌담이 둘러져 있었고, 돌담 안쪽에 반질반질 윤기 나는 검은흙이 있었다. 밭고랑은 가지런한 세로줄 무늬가 그려진 것처럼 정성스럽게 갈아져 있어 정원 같았다. 게다가 안개가 살짝 끼어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나는 밭길을 천천히 걸었다. 돌담 밖에 다른 밭이 있었다. 처음에 본 밭은 씨앗이 뿌려진 듯 검은흙뿐이었지만, 다음 밭은 연초록 새싹들이 조금씩 나 있었다. 다음 밭은 알 수 없는 풀이 자라고 있었는데 아마 뿌리채소가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밭은 잡초가 무성했다. 어떤 밭은 벌써 수확을 마친 것 같았다. 그렇게 저 멀리까지 낮은 돌담으로 구분된 다양한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조금 더 걸어보았다.

멀리서 볼 때는 정갈한 밭, 새싹이 나고 있는 밭들이 눈에 띄었었는데, 가보니 넓은 흙밭과 돌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곳에 멈춰서서 황량한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 평생 마음에 남을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왜 일본이었을까,

왜 제주의 돌담이었을까...


딸과 일본 여행 가기 직전, 지진 소식이 있었다.

작은 지진은 더 큰 지진을 부른다고 했다.

불안했지만 그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도 있다. 지진앱을 깔고 행동 요령을 찾아본 뒤에 계획대로 여행을 갔다. 큰 지진이 일어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테고, 어느 정도의 지진은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주의 돌담은 작물들을 감싸 안아 강한 바람에서 보호한다.

돌과 돌 사이의 작은 틈으로 세찬 바람이 지나가면서 그 힘이 약해진다.

허짜이 밭의 돌담 역시 이끼가 끼도록 오랜 시간 동안 지진을 견디며 밭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뒤돌아 걸었다.

바람이 휭 불었다.

어느새 안개가 걷혀있었다.


처음에 보았던 밭으로 돌아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까악 까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색연필로 돌담과 밭을 마음에 그려보았다.



눈별숲 그림, 꿈속에서 가본 허짜이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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