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간 꿈속의 여행

냉장고 안의 또 다른 남자

by 눈별숲

콕콕콕...


얼마 전, 열흘 간 고생한 뒤 겨우 가라앉았던 치통이 또다시 나의 잠을 두드려 깨웠다.

지난번처럼 통증이 밤새도록 나를 괴롭힐까 봐 너무 두려웠다.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소파에 앉아 평온한 장면을 떠올려 보려고 눈을 감았다.


허짜이의 밭이 넓게 펼쳐졌다.

글을 썼을 때와 또 다르게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정성스럽게 갈아져 있는 밭고랑을 보니 내가 평생 가지런히 살고자 했던 태도가 떠올랐다.

그런 노력이 내 마음 안에 이렇게 잘 자리 잡았구나.


잡초밭도 있었고 돌밭과 흙밭도 있었다.

그렇구나.

몸과 마음이 아파서 고통스러웠던 오늘도 소중한 날이었다.

내 마음 안은 참 넓기도 하다.


그 글을 완성하고 나서 구조가 느슨한 느낌이어서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나를 위로하고 있으니, 좋은 글이었구나.

글을 쓸 때는 무심코 지나갔던 것들이 완성하고 나서 읽을 때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편안했다.

약기운이 도는지 욱신거리던 통증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글쓰기는 뜨개질과 닮았다.

한코 한코 뜨다 보면, 어떤 모양이 될지 궁금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때로는 코를 빠뜨릴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 부분만 고치거나 풀어서 다시 뜨기도 하고, 티가 안 나면 그냥 두기도 한다.

조각들이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완성되면 그 작품은 하나의 인격이 되는 것 같다.

완성된 글은 어떤 인격이 되어 나에게 어떤 말을 할까. 늘 궁금하다.


얼마 전 [다시 만난 푸른 얼굴의 남자], 냉장고 3부 완결 편을 발행하고 나서 몇 시간 뒤에 에세이 크리에이터가 되었다고 알림이 왔고 배지를 받았다.


이게 뭐지?

'뚜렷한 주제로 우수한 창작 활동을 펼지는 창작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저 내 얘기를 쓴 것뿐인데, 글을 많이 쓰지도 않았는데..

의아했지만 어쨌든 기뻤다.


그런데 안내문을 읽다 보니 ‘활동성이 떨어지는 창작자의 경우 스토리 크리에이터 자격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처음에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일주일에 한편은 쓰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써보니 생각보다 글 한 편을 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난번에 아버지의 병환 이후 나도 많이 아파서 오래 글을 쓰지 못했는데, 그것이 마음에 숙제처럼 걸려있었다.

글쓰기는 나를 위해 쓰는 것이고 나를 위해 꾸준히 쓰기로 결심한 것이었으니,

일단 부담을 내려놓고 글이 마음속에서 올라오기를 기다리다가 일주일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내 속도대로 써보자고 막 다짐했을 때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배지를 받으니 그 마음이 흔들렸다.

조급해졌다.

활동성이 떨어진다는 기준이 작품 수 말하는 건가? 한 달에 몇 편이지? 나는 몇 편을 썼지?

못쓴 글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배지를 받은 만큼 더 잘 써야 할 텐데…


밭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초고만 가득한 '작가의 서랍'이 떠올랐다.

큰일 났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쓰지.

쓸 말이 없는데.


갑자기 잦아들던 통증이 살아나는 듯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일어나 냉동실에서 찜질용 아이스팩을 꺼내 볼에 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차가운 기운이 온 얼굴에 스며들면서 진저리가 쳐졌다.


하. 지긋지긋하다.

지난 글에서 분명 완벽주의 자칼은 벌레로 이름 붙여 유리병에 가두었는데.

냉장고 안에 있던 푸른 얼굴의 남자도 불쑥 떠올랐다.

그 남자, 지난번에 밖으로 나왔잖아.


아! 냉장고 안에는 그 남자 한 명만 있던 게 아니었구나.

냉장고는 엄청나게 컸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푸른 얼굴 남자들이 바글바글 거리고 있었다.


IMG_0670.heic 눈별숲 그림, 냉장고 안 푸른 얼굴의 남자들


이번에는 좀 종류가 다른 녀석이겠지.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손질이 잘된 헤어스타일에 팔짱을 끼고 턱 끝을 도도하게 치켜들고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은 발행할 수 없어!"


높은 기준의 남자다!


나에게 글쓰기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을 만드는 작업이다.

글을 한편 쓸 때마다 나는 깊어진다.

그 과정이 나는 즐겁다.

그래서 글을 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방해하는 높은 기준의 남자.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냉장고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다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

두렵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다.

일단 발견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으니 오늘은 그만하자. 앞으로 잘 지켜봐야지.


부디 냉장고 밖으로 나와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주기를 바란다.

미지근해진 아이스팩을 냉장고에 던져 넣고 씁쓸한 마음으로 문을 닫는다.


탁!


푸른 불빛은 사라지고 다시 어둠만 남았다.


자려고 누워 눈을 감았다.

그래! 이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머릿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또각또각 또가가가각' 소리가 신나게 이어지고 있었다.


...


아이고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내가 어이없고 귀여워서 픽 웃음이 나왔다.











1. 완벽주의 자칼

https://brunch.co.kr/@snowstarforest/35


2. 푸른 얼굴의 남자

https://brunch.co.kr/@snowstarforest/39


3. 다시 만난 푸른 얼굴의 남자

https://brunch.co.kr/@snowstarforest/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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