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삭제된 오늘, DelToday.

몸과 마음이 극하게 분주한 하루, 지워질 날일까? 기억될 날일까?

by 화몽
[ 순 삭 ]


요즘 아이들의 단어를 빌려 오늘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 내려본다. 이는 순식간에 삭제되었다는 의미다. 눈뜨자마자 정신없이 뛰어다닌 하루. 청매실이 익어가는 들 여름의 하늘, 올려다볼 찰나의 틈이 있었나? 내 몫의 일이 달려있는 끈이 팽팽히 당겨진다.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끊어져 발등 위로 떨어질 때야 움직이는 나. 매번 ‘미리 하자. 계획을 세우자. 할 일을 체크하자.’ 다짐하건만, 다짐은 다짐일 뿐 또로록 제자리로 굴러가 원위치하며 오뚝 선다. 발등에 떨어질 도끼날이 희번떡한 빛이 뿜어야 지난밤과 지금처럼 움직인다. ‘변하면 염라대왕 만날 날아 다가온데...’라며 앞머리를 쓰다듬고 다음을 기약한다. 확 변하면 훅 간다니.


이십여 년 호랑이 조교가 당근과 채찍으로 나를 단련시켜 주었다. 그의 말대로 할 일을 미리 리스트업하고 일의 중요도에 따라 일정을 정리한다. 정리한다? 과연? 이십여 년이 지나도 어렵다. 고유명사를 외우는 일만큼 내게는 버겁다. 그래도 세상살이에 주먹이 드나들만한 펑크를 낼 수는 없으니 다시 한번 할 일을 정리해본다.


아이 시험에 필요한 것들 목록이 일 번. 내 원서 내는 일이 이번. 삼사 오육... 은 일단 한 덩어리로 닥치는 대로 해내기로 머릿속에 메모한다.


몇 차례 눈이 떠진다. 5시 45분, 6시 26분, 7시 38분. 깊은 잠이 그립다. 아침이다. 오늘은 6월 12일이다. 간단하게 몸을 꼼지락 거린다. 등에 땀이 느껴지는 더운 날이다. 물을 마시고 다른 날보다 30분쯤 서둘러 아침을 준비한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식탁에 야채와 과일, 견과들을 올리고 커피를 내린다. 십여 일 계속되는 가슴 한편의 두근거림과 떨림은 갈비뼈 왼쪽에 파도의 너울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일요일이 지나면 나아질 거란 생각에 ‘휴~’하고 긴 날숨은 내어본다. 엄마도 아빠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느 날처럼 투닥거리기도 서로를 챙기기도 하며 포크로 접시 위를 뒤적이신다. 그러나 저분들도 나 같으리라. 내가 느끼는 이 극도의 긴장감이 느껴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복잡해지려는 순간 시계를 보니 9시다. 점심거리를 챙겨 나가는 뒤통수에 엄마가 물으신다. ‘미소야, 서류는 챙겼니?” 아차. 호랑이 조교의 이십 년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서둘러 서류를 챙겨 아빠 차에 탔다. “미소야, 차고 키는?” 아차차. 조교의 호각소리가 귓가에서 삑삑거린다. 차고 문을 닫고 출발하자 아빠 핸드폰이 이상하다시며 수리점에 가셔야겠다 하신다. “그럼 저 길 안 건너고 내릴게요. 감사해요. 아빠, 조심히 다녀오세요.” 횡단보도를 건너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가 교통카드를 찍는 순간, 아차 차차... 전철역이 아니라 먼저 쭈니 학교를 가야 하는데.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덜렁 거림의 끝판왕이네.


쭈니 일을 마치고 우체국에 들려 내 서류를 보내니 머릿속에서 진땀이 한 바가지가 쏟아진다. 눈을 감아본다. 하나, 둘, 셋. 잠시 머릿속이 대기권을 벗어났다 돌아온다. 잠시 요동을 치던 심장은 잠잠해진다. 몇 년을 보낸 익숙한 동네인데 오늘은 참 낯설다. 길이 눈에 잡히지 않는다. 방향키가 영 말을 듣지 않는다.


‘뭐 특별한 게 있나? 운동삼아 걷는 거지.’

오전의 날씨가 생각보다 뜨겁다. 마스크 때문에 더 하다. 할 일을 마쳐서 인지 마음은 한결 가볍다. 그러나 시간이 벌써... 조금만 서둘러 본다. 2020년 봄, 매년 만나는 봄이지만 올해의 봄은 누구에게나 아픈 봄이다. 나에게도 그런 계절이었다.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날 계절을 병원에서 어머님 간호로 보냈다. 공기의 온도가 뜨거워지는 6월, 지금도 병원을 향한다.


보조기를 이용해 걷기 시작하신 어머님을 도와드리며 여러 가지 운동을 봐드린가. 오전 시간에는 자전거로 다리 운동을 점을 찍는 식사 후 오후에도 같은 리듬으로 운동을 한다. 같이 호흡하며 다리를 들어 옮긴다. 어머님은 들숨을 마시며 손을 들어 굳어있는 근육들을 움직여준다. 옆에서 같이 호흡을 나누며 작게 또는 커다란 동작으로 손끝과 발끝의 퍼즐을 가져가 본다. 깊은숨이 오고 감에 시곗바늘은 뜨거운 햇살에 늘어진 엿가락처럼 허리를 내렸다가 방아쇠를 당긴 권총 같은 긴장감으로 팽팽해진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순삭.


시간은 순삭, 그러나 마음속은 충만하기를
# 순 삭
‘순간 삭제(瞬間削除)’또는 ‘순식간(瞬息間)에 삭제됨’을 줄여 이르는 말로, 어떤 것이 매우 빠르게 사라짐 또는 순식간에 없애버림을 뜻함. 처음에는 게임상에서 상대방의 캐릭터를 순식간에 죽였을 때 또는 자신의 캐릭터가 순식간에 죽었을 때 쓰다가,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급히 먹어버렸다는 의미, 또는 무언가를 하느라 돈이나 시간 따위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음을 아쉬워하는 의미로도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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