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 터지고, 스며들어 차오르는 풋풋한 계절
살아간다는.
산다는 건 어쩌면 ‘살아지기’ 때문이란 말처럼,
거부할 수 없는 물살에 던져진 채 하루를 흘려보낸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끌린 채 멈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다닌다.
숨을 이어가기 위해 수면 위로, 아래로 온몸을 흔든다. 참을 수 없는 생명을 따라.
종일의 무게로 욱신거리는 발을 주무를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던 노랫말,
‘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 쓱_ 그렇게 누구나 나날을 떠나보낸다.
봄은 늘 너의 한편에 묻어있다.
먼지 쌓인 사진첩처럼, 희미해진 청현의 조각들이 그림자에 젖은 채.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그곳에서 목놓고 기다릴 뿐이다.
망설이지 말자. 한 잎, 두 꽃, 세 바람, 네 송이의 구름에 깃든 봄의 사소함.
늘봄은 다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여기에 스며들어 서성이고 있다.
기다리고, 멈춰 서고, 바라보고, 또 그렇게 숨을 고르다…
그럼에도 살아내는 순간, 풀내음 그을음 그득한 날것 그대로의 봄.
끝 겨울이 얼룩져 붙어 있는 소매를 털어낸 연두의 잎맥은 스스로 날을 센다.
얼어 엉긴 땅껍질을 어깨로 밀고, 구겨진 허리를 겨우 펴 첫 숨을 뱉어내는 여린 순.
그 힘겨운 미숙함, 쓱_ 하니 손끝으로 보듬어낸다.
애달파라, 아득히 피어오르는 청록아. 흙 내 한껏 풋풋한 꼭지를 뜯어낸다.
서걱서걱, 한입 베어 삼키고 두 입 세 입으로 이어지는 늘봄.
혀끝은 풋향을 깨물고, 사계절을 목 넘기며 봄으로 새로 깨어난다.
내 혀끝에 봄의 풋향이 닿는다. 참다 참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툭,
하고 불거진 숨결은 나를 살려 세우고, 매 숨의 이유가 된다.
그럼에 나는 주머니칼을 들이민다.
봄의 새 결을 지닌 뿌리와 줄기, 잎과 꽃을 입안에 가득 머금는다.
뿌리를 뽑아낸 달래와 냉이,
줄기를 엮어낸 두릅,
어린잎을 모은 쑥과 봄동,
단단한 꽃망울 유채와 진달래를 고이 눌러 고슬고슬하게 부쳐내는 중이다.
나는. 너도.
인고의 계절을 견뎌낸 자국이 바로 봄나물이다.
우리 땅에서 태어나, 가장 먼저 새날을 알린다. 포슬포슬한 향기가 그릇마다 서로를 보듬어낸다.
쌉싸름함이 혀끝을 찌르면 겨우내 묵었던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자연을 받아들이면 구부정한 허리는 솟고 걸음은 봄을 바라본다. 자연스레, 그러하게…
태고의 시간을 삼키는 일, 햇살과 바람, 굽이굽이 흐르는 물의 기운을 모아낸 생명의 흔적을 조물조물 무쳐낸 우리네 음식이다. 살아온 시간을 고스란히 씹어 내일을 지켜낼 약속이다.
겨울을 견디고 한 해를 보내기 위한 다짐이 올라온 밥상. 묵직한 흙빛의 된장, 그윽한 갈빛의 간장, 파도의 비늘빛을 품은 소금으로 맛을 낸다. 할머니의 깊은 주름에서 흘러나온 달큼함에 고소한 별가루를 한 줌 흩뿌려 아삭 한입.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내 심장을 두드리는 작은 망치 같은 한 숟가락. 쌉싸름한 맛은 손끝에서 코흘리개 시절의 한 조각을 끄집어내고 굳은살을 깨고 나와 내게 풋풋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민들레 한줄기와 주변에 무심히 자란 잡초들을 뜯어 엄마 놀이를 하던 그 시절. 집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모난 돌로 줄기를 자르고 유리병뚜껑 위에 올려 무쳐 한 상 차린다.
“미 - 소 —- 야!”
해가 질 녘 온 동네에 울려 퍼지던 엄마의 목소리가 시간이었던 그때. 동무와 나누던 그 동그란 마음은 어디로 흩어져간 걸까?
어린 시절의 놀잇감이 지금 내게는 옛 동네 골목으로 끌어들인다. 작은 뿌리 하나, 두어 장의 잎사귀, 고사리손이 꼭 쥐었던 줄기의 가녀린 생명력은 그 시절에 멈춰버렸다. 봄 채소들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부족함은 견디어낸 할아버지의 지혜였고, 몰래 마음 하나를 더 올려주시던 할머니의 따스함이었다. 꼭 이어 잡은 가족의 손, 오늘의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할 작은 선물이었다.
얼마 전, 엄마가 쑥버무리를 해주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릇 앞에서 아이들은 “풋풋한 냄새가 난다”며 코를 찡긋했지만. 쌉싸래한 풋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오래된 기억까지 되씹게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해 웃음이 났다. 그 따스함을 아이들도 오래 기억하기를, 그래서 우리 봄내음을 더 아끼기를.
이제는 집 앞 마트에도 이미 때를 잊을 과채들이 가득하고, 바다 건너온 온갖 새로운 먹거리들이 줄줄이 있다. 우리네 밥상을 구수한 미소로 채우던 봄나물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그 자리를 오색찬란한 산해진미가 차지하고 있다. 피자와 햄버거가 익숙해지는 아이들에게 지켜내고 이어가야 할 ‘봄의 연둣빛’을 전해주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일까?
자연 그대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억과 굽이굽이 이어진 세대를 먹는다.
새벽을 베어 물고 갓 눈을 뜬 노란 꽃망울이 꾹… 꾹 하고 버티며 초등학교 담장에 가득 맺히고, 달칵 달칵 마른바람에 부딪히던 마른 담벼락, 길과 길, 시선과 시선, 발걸음과 발걸음이 멈춰서 봄빛 신호등을 바라보는 투명한 여린 눈빛에 달린 망울들이 뽀로롱하며 터져 나오는 풋풋함이 곧 늘봄이다. 아, 그렇지. 봄에 터져 나오는 것은 꽃만은 아니다. 내 안의 굳은살도 툭, 하고 새살을 내민다.
늘봄이다. 다시 봄이다. 다른 봄이다. 매초, 매분, 매시, 매일이 돌림노래처럼 다시 오지만 단 한음도 같은 음은 없다. 어제의 음표와 오늘의 음표는 다르다. 반복되는 숨겨진 차이를 알아차릴 때, 그제야 새로 온다. 같은 소리로 불러내는 봄은 없다. 들려오는 봄 향에 귀를 열고, 잊혀가는 봄을 돌아보며 맞이하는 나로. 우리의 마음도 돌아온 그 봄에 열린다.
“아직 남은 꿈들이 많아 그리움만 쌓이네”라는 노랫말처럼…
봄도, 한 날의 조각도. 삶의 결도 흘러간다.
그러다 나를 잡아 흔든다. 불쑥 다가와 내 곁을 훔쳐 간다.
살아있다고, 살아간다고, 산다는 건, 어쩌면 살아지기 때문이라며…
연둣빛 바람이 스미다, 터져 오른다.
콩- , 다시 쿵-. 아직 덜 녹은 심장을 두드린다. 두근. … 또 두근.
아, 두근거림이 밀려온다. 봄을, 연둣빛을, 꽉 끌어안는다.
이건, 완연히 날것의 봄. 낯섦이 터진 봄이다.
봄. 너의 봄은 어디에, 나의 봄은 어디쯤에?
어서 와, 낯선 봄. 와락 안아줄 테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