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삶의 향기, 가을_ 붉은 숨의 무대

여전히 익어가는 가을빛 무대, 주인공은 함께 할 우리,

by 화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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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지직, 스피커가 슬슬 시동을 건다. 아아아아…

사회 보는 친구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천장까지 울려 퍼지며 강당을 채웠다.

“자자. 조용히 해주세요. 다음 순서는 2학년 10반 박미소 학생의 순서입니다. 혼자 나온 친구는 처음인데요? 노래는... 박수로 불러볼까요?"


웅성대던 강당이 금세 한 덩어리의 박수 소리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내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터지기 일초직전이었다.

'미쳤지. 미쳤어.'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지만, 정신줄을 이미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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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서 밑도 끝도 없는 용기가 솟았을까.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나는 출사표를 던졌다. 사람들 앞에 서면 온몸이 단풍나무잎처럼 붉게 물들고 손끝은 사시나무가 되어 덜덜 떨던 내가 말이다.


아이들은 몇 주 전부터 팀을 꾸려 맹훈련을 했지만, 나는 달랐다. 흥얼거리며 리듬을 몇 번 맞춰본 것이 전부였다. 동네 가게에서 산 싸구려 선글라스로 얼굴의 절반은 가리고 검은 옷 속에 숨어들었다. 코끝까지 당겨 올린 붉은 페어즐리 스카프가 보이는 나 전부였다. 나는 컴컴한 무대 한가운데로 향했다.


총천연색 조명이 번쩍이고, 커지는 음악은 강당을 너머 천지를 흔들었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심장이 북처럼 쿵쿵 울렸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에 바르르 떨렸지만, 그 떨림마저 박자가 되어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그저 그 안에 몸을 던졌다. 발밑에서 반들거리는 무대바닥에 미끄러지는 발은 땀으로 젖어갔다. 모자 안으로 질끈 묶은 스카프 끝자락이 들썩이며 작은 불꽃처럼 흔들렸다. 천 개의 눈동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무대 위. 쥐구멍은 없었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순간, 친구들의 눈앞에 선 나는 미소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음악은 멈췄고 바닥에는 모자가 뒹굴고 있었다. 검은색 야구점퍼는 어깨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그때,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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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몸짓은 여름의 파도와 같았다. 뜨겁고 거칠게 밀려들다가 찰나로 부서지듯 고요히 잠잠해지는 리듬. 그 안에서 나는 내가 몰랐던 날 찾아냈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움직임 그 자체가 주는 자유가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티브이 속 댄스가수들을 흉내 내던 사춘기 소녀는 사라지고,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이 주는 경이로움이 더 궁금해졌다. 격정과 고요가 공존하는 곳, 내 몸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선가 자라났다.


나의 버킷리스트의 첫 번째는 언제나 발레다. 이 나이에? 구부정해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새가슴은 활짝 열어 토슈즈를 신는 나로 서고 싶다. 발꿈치가 서서히 떠오르고, 발끝만으로 몸을 바로 선다. 길게 뻗은 손은 공기에 매달린 듯 멈추려 하지만 너머를 향한 눈빛은 그 뒤를 향해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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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불씨는 사차원 아니 차원을 가늠키 어려운 여름의 불꽃놀이 같다. 춤, 노래도 그림도 글쓰기도 결국 하나의 결을 가진다. 내 안의 것들을 모두 꺼내놓을 때, 오히려 배부르고 충만해진다. 남들의 시선 따윈 상관없다. 그저 삶을 매 순간 넘쳐나게 살고 싶다. 그것이 여름에 발견한 내 모습이다.

홀로 터져 오르던 이 폭죽은 어쩌면 내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눈빛 속에서 늘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남겨놓은 불씨가 있었음을. 닿지는 않았지만, 이미 닿아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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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가지가 꺾어지는 소리, 아빠의 말투는 뚝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아빠의 마음은 방향이 정해진 바람이라 나는 따라 불어야만 했다. ‘아니요.’ 또는. ‘싫어요.’라는 답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가을 하늘을 쪼개는 천둥 같은 아빠의 목소리는 번쩍 내리쳐 내 귀에 닿았다. 대학교 입학식을 며칠 앞둔 그날도 하늘을 두쪽낼만 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미소야! 빨리 안 나오니!”


섬광이 번쩍하는 큰 목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 아빠는 종이 두장을 앞에 두고 덜그럭거리며 서랍 속의 인주를 찾고 계셨다. 쪼르르 나간 내 앞에 일종의 서약서를 내미셨다. 대학생의 품격이라 쓰여 있었지만, 서로의 약속이 아닌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붉은색으로 그어놓은 금이었다. 절반은 품격을 위한 문장이 아니라, 발목을 묶는 끈처럼 보였다. ‘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는다.’로 시작하여 ‘학생의 신분에 어긋나는 차림은 하지 않는다.’로 끝나는, 조항들이 서약서라기보다는 족쇄처럼 읽혔다. 그럼에도 자유인이 된듯한 착각에 대수롭지 않게 지키겠노라 약속했다. 끄덕이는 고개가 멈추기도 전에 아빠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


손바닥 위에 올라갈만한 작은 검은 플라스틱 통은 크기보다 무거운 힘을 가졌다. 아빠는 두툼한 손으로 군데군데 긁힌 자국들이 선명한 뚜껑을 튕겼다. 책상 위를 빙그르 두어 바퀴 굴러다니다 멈춘 뚜껑에 비친 내 눈빛은 맑지 않았다. 아빠에게 붙들린 내 엄지 손가락은 석양빛 인주에 비벼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질감이었지만 손가락 끝에는 묘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미끈한 다홍빛 가루들이 지문 사이로 스며들어 눅진한 냄새를 풍겼다. 가을비에 젖은 새벽의 흙냄새처럼 되돌릴 수 없는 증명의 순간, 종이 위로 옮겨진 무늬는 흡사 짓이겨진 단풍잎의 다홍빛 잎맥이었다. 앙상하게 녹아 흐른 타원의 자국이 찍힌 서약서를 바라보시며 흐뭇해하시는 아빠의 표정에 할 말이 없었다. 아빠의 눈가는 이제 다 되었다며 미소 지었지만, 내 속은 추수를 끝낸 뒤 텅 빈 바람만 스쳐가는 들판이었다.


"요즘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그림이 고상해야지 다들 생각들이 있는 건지. 넌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여자가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덮어놓았던 서약서를 열어봤다 바로 다시 엎었다.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줄줄이 쓰여있었다. 30여 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의 내겐 종이 한 장이었을 뿐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한순간 모든 것을 삼킬 듯 거친 아빠의 단호함은 항상 과했다. 어린 내겐 늦가을의 바람 같은 오지랖이었다. 불쑥 옷깃을 파고들어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걱정은 격정으로 사랑은 참견으로, 아빠도 서툴렀었다. 이제는 나도 안다. 잎을 떨군 가을 나무처럼 거친 말들 아래 단단한 뿌리가 있었음을,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음을. 늘 어딘가 불편한 마음, 아빠의 눈빛을 애써 피하고 아빠의 마음은 쓰윽 덮어버렸다. 쓸어버리면 사라질 낙엽들, 그 밑을 따뜻하게 지켜내는 흙의 의미를 미처 몰랐다. 그렇다. 어른들의 잔소리였다. 귀찮고 쓸쓸한 가을바람. 창문을 열어놓고 새벽을 지나면 목이 까끌해지는, 불편한 그런 계절의 바람 같았다. 휘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들판은 영글고 열매는 익어간다는 걸 희미하게나 알아가는 나는 지금 가을을 지난다.


예술은 품격이라며 고개를 저으셨지만, 아빠의 눈빛 안쪽에서 가을밤 들녘을 밝히는 호롱불처럼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낙엽이 바람에 쓸려도, 재 속에 감춰둔 불씨가 다시 살아나듯. 아빠의 눈빛 속에서 흔들리던 불꽃은 조용히 내게로 건너왔다. 셔터를 누르던 아빠의 손끝, 순간을 붙잡으려던 눈빛. 예술가의 몸짓 그 순정의 모습이었다. 겉으로는 부정했지만, 빛과 그림자로 본인만의 세상을 그려내는 아빠의 손길이 가장 예술가다웠다.


학교 동기 회보에 낼 글이라며 내게 내미신 짧은 가을 인사 글을 보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진 기자셨던 아빠가 찍은 손주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알겠다. 아빠가 예술을 한다는 자,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연주하며 춤을 추는 사람들을 그리도 혐오스러운 존재로 깎아내렸는지를. 사실은 그 가슴 안에도 뜨거운 불씨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나란 우물 안에 던져진 두레박이 미묘하게 출렁인다. 깊은 바닥의 잔물이 찰랑이며 심연을 흔든다. 켜켜이 쌓인 흙을 밀치며 때를 잊은 잎새 하나가 고개를 불쑥 내민다. 순간 터져 나온 눈물, 분명 청승이 아니라 계절 앓이다. 기침처럼 불쑥 치고 들어오는 서늘함, 들판을 스치는 갈대의 서걱임 같은.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미완의 나를 빚어간다. 계절의 노래가 올곧던 공기의 향을 움직인다. 가을 아침, 늘 듣던 노래 가사가 더하는 기쁨으로, 행복의 곱이 된다. 작은 새들의 평범한 종알거림이 그렇듯 일상 속의 사소한 울림이 불현듯 나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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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링, 빨래가 다 되었습니다.’

세탁기의 소리가 나를 현재로 되돌린다. 수건 끝을 흔들며 박자를 잡고,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바람결에 발을 맞춘다. 이곳저곳에서 터져 울리는 사소한 변주들에 귓바퀴를 걸고 팔을 턴다. 새하얀 빨래들에 낙엽빛 인주가 짓게 스미고 셔터의 누름 소리가 걸려있다. 밥대신 빵이나 먹고 다니니 어디 쓰겠냐며,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혀를 차시던 아빠. 그 눈에는 곧 쉰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도 여전히 어린 딸일 뿐이다. 어린 소녀는 여전히 여물어가는 계절을 노래하고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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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남겨진 것들로 노래한다. 마당 한쪽에 쓸려 모인 낙엽처럼, 버려진 듯한 것도 소리를 낸다. 귀찮은 목소리, 발아래 부러진 잔가지도 박자를 가진다. 가려진 그림자마저 빛으로 덧칠되어 선명해진다. 그러니 또 한 번의 가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아빠에게서 번져온 불씨가 떨궈진 낙엽에 꽃을 피운다.


내 안의 똘씨여, 이제 나와도 괜찮아. 숨겨둔 다홍빛 스카프를 흔들며 무대로 오를까? 낭랑 18세가 아닌, 낭만 50세로.


이 가을, 주인공은 우리예요. 내 손을 잡고, 타오르는 붉은 숨으로! “

월, 화, 수, 목,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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