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마음이 다시 열릴 때, 책은 향기로 피어난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유리병의 뚜껑 비틀어 돌린다. 손바닥이 축축해져 도무지 열릴 틈이 없다. 허리춤에 쓰윽 닦아 병을 끌어안고 끙끙거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뻥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향은 담콤하고 진했다. 책은 늘 그렇게 열린다.
나는 살아있는 이 감각이 좋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스쳐가는 종이의 결, 어떤 책 하나 같은 촉감으로 읽히지 않는다. 공기와 종이가 스치는 가벼운 소리, 사각거리며 넘어가는 이야기들이 걸어오는 대화는 특별하다. 검은색과 흰색이 만들어내는 무늬는 선과 점, 면을 이루며 단순한 형태를 넘어서 의미가 되고, 꾹꾹 눌러앉은 활자의 줄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따라간다. 내 마음을 훔쳐가는 향기가 있었다. 어떤 문장은 내 손끝을 잡아끌었다. 신부의 면사포에 감싸인 진주알, 분홍빛 입술로 오물거리는 아기의 숨결, 햇빛에 그을린 얼굴의 웃음소리가 손끝에서 속삭이며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스르륵 넘어간다.
기억 속 할아버지의 손등의 결, 아버지가 벗어놓은 와이셔츠의 깃에 찌든 세월의 내음, 중절모 그늘아래 번져있던 점과 주름이 만들어낸 무늬들이 글자가 되고 단어로 자라나 읽히는 가슴마다 그들의 이야기로 적혀가는 시간. 간밤에 내린 비에 흠뻑 젖어버린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 가을의 갈대밭을 흩고 지나는 바람이 내뿜는 사각거림, 툭, 부러질듯한 소리를 내며 바스러지는 모난 구석자리의 한 페이지. 실수로 같은 책을 산적도 있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거쳐간 시간의 터널, 먼지가 쌓여 매끈하게 다듬어진 결들이 만든다. 나는 그 흔적을 따라 걷는다. 작은 새의 날갯짓에 일어난 바람결이 우리의 숨결이 되고, 겹겹이 올라오는 파도를 넘어 삶은 깊은 바람에 실려온다.
현관옆 작은방, 문고리 근처는 손때로 노랗게 익었다. 4평 남짓한 이곳은 작은 우주다. 고개를 들이밀면 왼쪽 벽부터 꺾여 큰 창문 아래까지 책장이 가득하다. 반쯤 드리운 블라인드 틈으로 여물어가는 가을 잎들이 흔들리다 맺힌다. 오랜 시간 비벼 묻어난 자국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번져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오후의 햇살은 잎맥에 흘러 걸린다. 소파옆 책장에 얼기설기 엮어있는 책들 사이를 들썩이다 적당히 비집고 나온 묵직한 한 권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왼손으로 책 등을 받치고 남은 손으로 페이지의 끝을 잡는다. 후루룩 넘기며 올라오는 단어들의 맛을 본다. 손끝에 감기는 아삭함, 달착지근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미묘한 발란스를 눈으로 따라간다. 기계로 놓은 수처럼 반복되는 점들이 이어지는 책장들은 바람을 머금고 사각거린다. 노을이 물결치는 가을 들녘에 걸린 문장에 호흡이 멈춘다. 액자에 반사되는 햇살이 기울며 나와 눈을 맞추고, 활자들 틈으로 미끄러지듯 지나면 문장의 표정도 달라진다. 웃음이 번지는 점들 사이로 손을 쓱 문질러 넘기면 글자들이 울고 소리친다. 선명해지는 삶의 여백에 나 또한 한 결을 더하며 뾰족해진다. 언 땅을 뚫고 솟아날 힘, 절벽을 건너갈 용기가 짙어진다. 눈빛이 살아나고, 곁에 머문다.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나를 위로한다. 서툰 길에서 이끌어주는 밥그릇을 나누는 친구처럼, 책은 돌돌 말려있는 지도다. 겹쳐진 틈새로 흘러나오는 음표들이 연주하는 소리는 모든 소리의 합이 된다. 산 정상에서 들이마신 바람의 솔로, 높이와 폭이 다른 나무들이 불어주는 오케스트라, 사막의 모래알들이 내뿜는 열기는 거친 재즈로 변주되어 삶의 의미를 넓혀간다.
책이 왜 좋으냐 묻는다면, 여전히 마땅한 답을 찾을 만큼 읽지 못했다고 답할 것이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말하지 않고 보이는 삶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전하려 하지 않지만 읽히는 마음들. 그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움푹 파인 웅덩이마다 여문 파동이 번지고, 그만큼의 감동이 자라 나 또한 기적을 읽는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다시 거닐며 주워내는 알곡들이 남긴 포만감은 책이 주는 의외의 수확이다. 때론 들 영근 알알 이를 씹어 삼킬 때의 생채기가 서로를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A는 B가 아니라.’라는 명제를 ‘A는 B와 같다’ 또는 ‘A와 B는 서로를 포함한 다른 상태다’라는 낯선 계산법은 책 속에서 언제나 가능하다.
숱한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지층, 수천 년간 인간이 빚어낸 사각의 광물이다. 단순히 딱딱한 틀에 갇힌 직사각형의 묵직한 돌조각의 뚜껑을 열면 저자의 세계가 열린다. 그의 세계 속에는 수많은 이들이 담겨있는 액자들이 그득하다. 나와 닿아있는 시공간은 X, Y, Z의 좌표를 타고 무한으로 뻗어간다. 그리고 내 안의 한 점으로 다시 돌아와 싹을 틔운다.
“고요한 푸른빛, 푸른 시간.”
아침 녘의 띄우는 공기는 푸르다. 차가워진 바람의 색은 푸르다. 이미 알고 있던 푸름은 활자를 겪으며 새롭게 숨을 쉰다. 한강이 만들어낸 색은 다른 의미로 나를 깨운다. 흔들거리는 커튼 자락 뒤에 나를 찾아온 이가 있다. 오늘을 함께 할 그와 마실 커피를 내린다. 흔들리던 캡슐 머신이 잦아지고 짓눌린 아몬드의 향이 뒷목을 타고 올라올 즈음 커피잔 위에는 생각들이 겹쳐 번진다. 손가락에 걸린 머그컵 손잡이가 따스하다. 창밖의 초록이 지고 붉어져가는 계절이라 더 그러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진부한 말이 낯 뜨겁지만 이 보다 더 이 계절을 정의 내릴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창 건너 붉은 벽이 닳아빠진 자줏빛으로 깊어질 때 손에 닿는 텁텁한 종이의 질감이란. 켜켜이 쌓여 진부해져 가는 이파리사이에서 꿈틀거리는 잔벌레들의 셀 수 없는 발의 자취들이 눈에 읽힐 때의 쾌감은 콰작하고 씹히는 크래커 모서리의 맛이다. 이보다 진한 행복은 흔치 않다. 나의 존재에 진심을 다하는 시간, 책과 함께할 때다.
여기저기 뜯기고 헤쳐진 난간에 손을 스치며 중얼거린다.
“새는 알에서 나와, 나는 그 알을 깨려는 새끼새.”
제법 스산해진 아침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나는 앞으로 나간다. 검은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낙엽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며 세상에 익숙해 져가는 이방인이 곧 우리다. 흩어진 운동화 끈을 묶으려 곧 나눌 책의 질문들을 머릿속에 엮는다. 타자의 이야기를 통해 흩어진 경험들을 이어 새로운 지평의 문을 여는 순간을 맞으러 간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 했던가. 자전거 페달을 바삐 밟던 마음을 잠시 들어 앞을 그리고 좌우를 살핀다. 길가에서 흔들리는 노란색 깃발들이 이정표가 된다. 붉은색 신호등이 서두르던 나를 잠시 멈추게 한다. 더 멀리 바라보게 한다. 귀를 너르게 펼치게 한다.
연남동 골목의 커피숍에 도착했다. 삐끗한 철제 계단을 올라 묵직한 유리문을 밀어 연다. 높낮이가 다른 의자와 테이블이 살아가는 매 순간과 닮았다. 우리를 보여주는 방식이 그렇듯 스치는 질감도 재각각이다. “주문하시겠어요?” “따뜻한 라떼에 샷추가해 주세요… 아, 추가샷은 빼주세요. 죄송해요.” 이미 아침에 한잔을 마셨다. 내 몫에 과하면 권력이 되고, 나를 무너뜨린다. 잠을 위한 마음이 가장 사소하면서 중요하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만든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 들고 있던 진동벨을 내려놓고 물 한잔을 따라 들었다. 벽이 반쯤 벗겨있는 턱을 너머 이미 자리하고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의자를 끌어 앉았다. 오가는 말속에 흩어져 있던 빵부스러기들이 모인다. 활자가 남긴 자국을 서로 나눠가지며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밀고 당기며 펼쳐지는 각자의 삶의 페이지. 책의 안으로 빠져들었다 밖으로 뛰쳐 나오기도 하면서 기억의 상처, 시작의 기쁨, 평범한 악, 지켜내야 할 의무들을 씨실과 날실로 주고받으며 여물어 갔다. 웃음이 섞이다가, 긴 침묵이 찾아오기도 한다. 침묵은 고요가 아닌 사유의 순간으로 우리를 더 가깝게 했다. 커피의 향과 지나가는 오토바이 타이어가 문질러낸 질퍽한 내음이 섞이며 책장을 넘겼다.
“사소한 것들이 삶을 지탱한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사소하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것들을 나누며 깊어져가는 대화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
끝없이 꽂히는 점들이 생각의 말줄임표가 모임에서 함께한 질문들을 곱씹게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자전거 바퀴가 튕겨낸 낙엽의 파편들이 남아있는 숙제 같다. 돌아온 거실 한쪽에 낮의 대화가 잔향으로 남아있다. 입술 자국이 남아있는 커피잔, 이리저리 뒹구는 쿠션을 두드리며 창밖으로 떨어지는 주황색 노을에 시선이 머문다. 바람결에 흔들려 창에 매달린 낙엽들을 다시 펼친 책장사이에 담는다. 닫히는 사이로 오늘의 문장들이 되살아난다. 그 숨에 같이 머물며 저녁거리를 다듬는다.
가을은, 떨어지는 것 속에서 끝을 보지 않고 시작을 본다.
책장을 덮고 나면 문장들을 사라지는 듯하지만, 가족들과 보내는 늦은 시간의 틈사이로 되살아난다. 아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가 책 사이를 연결하는 밑줄이 된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주고받는 웃음은 활자의 공백을 채운다. 현관에 쌓인 신발들처럼, 함께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내 삶의 조각이 된다. 독서 모임도 그렇다. 접혀 있는 페이지들은 다 다르지만 합집합에 모인 삶의 모습들은 묘하게 닮아있다. 각자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는 대화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 커다란 나무가 된다. 떨어져 나온 잎이 낙엽이 흩어진 사유가 되고 같은 방향으로 쓸려와 사랑이 된다.
버스 정류장을 스치간 억새의 바람, 편의점 냉장고 속 음료수에 맺힌 계절,
돌아가는 세탁기 안 달그락거리는 잎새,
문 앞에 붙여진 10월의 광고지,
주차장 계단 틈새에 낀 낙엽 조각 곁에 있다.
평범함의 끝자락을 가을에서 나는 본다.
매 순간, 낮과 밤, 계절의 모든 모퉁이에 이야기가 묻혀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수확한 낱알들은 우리를 우리답게 묶어준다.
햅쌀로 갓 지어낸 밥처럼 퍼져 나가는 따스한 향.
책이 이어준 시간과 그 닿아있는 마음으로 나는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