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계절
기억들이 덕지덕지 붙어 흘러내리며 그려낸 자국들이 흡사 나의 눈물 같기도 하고 너의 긴 머리칼 같기도 하다. 일기예보는 예보라기보다는 실황중계에 가깝다. 분명히 맑은 날씨라고 했었다. 영하로 내려가는 12월에 어울리는 그런 하루. 그런데 얼어붙은 거리는 내 마음에 바짝 다가와 차가운 비를 뿌린다. 그래, 극점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비다. 빗방울에 닿는 모든 것이 일순 얼어버린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온 비가 분명하다. 얼음도 물도 아닌 애꿎은 상태로 쏟아 내리는 비는 미지근한 공간에 숨어있는 나를 세상의 끝으로 튕겨버린다. 안 그래도 빙점의 연속인 일상은 반항할 힘을 잃고 꽁꽁 얼어버린다. 기억은 이리도 푸른데 이곳의 생은 냉담하다.
여린 나는, 한 겨울을 지나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
서늘한 두 눈을 감는다. 어릴 때 발을 담그고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모래알의 까끌까끌함이 들린다. 발을 쫑긋 들고 뛰어다녔던 동해의 깊이보다 더 푸른 하늘이 앞에 있다. 이리도 푸르르고 맑은데. 눈을 열고 받아들이는 공기는 이리도 푸르르고 따사로운데. 창을 긁는 내 손끝은 얼어간다.
이곳의 거대한 창들은 희뿌연 구름이 내려앉아 쳐진 빗금들로 어두워진다. 나는 서로를 의지하고 붙어있는 창들에 가까이 간다. 어깨를 기대자 내 온기가 눈꽃처럼 번진다. 널따란 유리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나와 12월 사이에 서 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선 위, 오늘은 기꺼이 묻는다. 졸린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애매한 경계에서 돌아가는 방법을 아는지?
서늘한 바람에 베이지 않는 방법을 아는지?
아침이 올 때쯤에 인사를 전하는 방법을 하는지? 밤의 끝에 기꺼이 안부를 남기는 방법을 아는지?
그런 매일이 와르르 무너질 때도 도망가지 않고 참아낼 방법을 아는지?
이런저런, 뭔가 하는 방법을 잊지 않고 있는지를. 바로 입을 열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내 두 눈은 12월의 간절함으로 짙푸른 멍처럼 번져온다. 멍든 눈은 스르르 감기고, 어려운 마음은 결국 화해하는 방법마저 잊었다.
“위위윙, 띵”
전자레인지의 불이 꺼진다. 나는 검은색 손잡이를 당겨 그 안을 쑥 들여다본다. 주황 불빛이 더해져 뜨끈한 어묵 국물의 김이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작은 사각 공간을 가득 채운 매콤함이 코를 찌른다. 따뜻하다. 내 손도 덩달아 따뜻해진다. 까끌까끌한 니트의 소매 끝이 간질이는 촉감 덕에 더 따듯해진다. 하얀 수저 위를 하얗게 태운 국물을 후루룩 넘긴다. 목을 넘어가는 국물이 바짝 날이 선 나를 나른하게 눕힌다. 매서운 눈 끝이 마모되어 간다. 온도의 간극이란 이런 건가? 아니면 나는 다시 도망갈 준비 중인 건가? 언제나처럼 대충 타협하고 숨어버리며 순간을 덮어버리려는 것일 수도.
‘무엇이 되었든, 따뜻해졌어. 그래, 이 정도면. 별거가 있나?’
나를 향해 중얼거리는 말들에 '픽' 하고 웃음이 나온다. 일이 분 전 이곳의 거대 유리에 기댄 채 산산이 부서져 가던 나는 어디로 녹아내린 건지?
“띠링~띵”
“야. 오늘은 네가 살 차례야!”
“치사하게, 그래 내가 산다, 사.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러냐?”
발목까지 덮은 롱패딩을 입은 근처 중학생들이 하나, 둘 그리고 셋이다. 뭐가 그리 즐거울까?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서로를 뜯어먹을 것 같더니 금방 컵라면들을 골라 히득거리며 웃는다. 그렇지.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상처는 덮고 낭만을 그릴 때니까. 논리란 편의점 입구 옆에 드리워진 하수구 구멍에 던져버리고 들어왔을 녀석들이다. 익는 둥 마는 둥 꼿꼿한 면발을 우두둑 씹어 먹으며 키득거린다. 누구랑 누가 사귄다더라. 옆 여중에 정말 이쁜 여학생이 전학 왔더라더라. 4층 수학학원에 새로 온 A 중학교 학생이 수학의 신이다더라. SNS에 올라온 웃긴 영상이 있다더라. 등등. 손바닥만 한 컵라면 한 개씩 부순 녀석들은 1+1 하는 핫바들을 들고 전자레인지 앞으로 달려간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급히 포장을 뜯고 한입에 끝내고 우르르 빠져나간다. 어, 한 아이가 아직 있다. 밀물처럼 쏟아져 나간 뒤에 남은 아이는 안개 낀 안경 너머로 이곳의 유리 밖을 떠돈다. 머물지 못한 채 무겁게 잠신 숨을 여는 아이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렇게나 뜯긴 초코우유 하나가 아이의 앞에서 덤덤히 말라간다. 아이는 시선은 느릿느릿 냉기와 온기를 오가며 생을 잃어간다. 툭하고 던져진 손끝이 테이블 위에 말을 남긴다. 내겐 보이지 않지만 읽을 수 있다. 초점 잃은 어깨는 더 가라앉고 무겁게 일어난 아이는 그림자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간다. 끌려가는 그림자 끝자락이 문틈에 끼어 길어져만 간다. 문틈에 끼이고 문턱에 갇혀 몸은 차가워졌지만, 그 아이는 결국 하얗고 동그랗고 이리저리 뜨거운 국물들이 흩어져 물든 테이블 위에 자기를 남겨놓고 갔네. 나는 일어나 자리를 옮긴다. 아이가 앉았던 의자에서 아이의 안경 너머를 훔쳐본다.
“띠링~띵. 지지의. ”
그는 차가웠다. 그가 들어서자, 주변이 바로 얼어붙었다. 얼마나 밖에서 오래 있었던 걸까? 장갑을 벗고 내 옆을 스치는 그는 겨울 냄새를 지독하게도 뱉어낸다. 짧게 드러난 그의 손등은 빨갛고 거칠다. 손가락 마디는 여기저기 까져있고. 그는 급히 걷는다. 그는 서둘러 고른다. 그는 음료수들을 빠르게 흩어보거나 가쁘게 몸을 돌린다. 그의 뒷모습은 여기저기 젖어있다. 고된 땀에 목뒤는 축축하고 잠시 내린 눈 자취가 그의 어깨에 남아있다. 바지 끝자락과 신발 바닥에는 그가 지나온 길들이 그대로 축축하게 굳어 들러붙어 있다. 입구에 있는 따뜻한 음료수대에서 캔 하나를 꺼낸 목까지 차오른 숨을 잠시 고른다. 옆구리에 포개진 장갑을 대충 끼고는 움켜잡은 캔을 보는 그의 눈이 앞으로 기운다. 비스듬한 얼굴에 비친 비틀린 한쪽 어깨가 서늘하게 굳는다. 곧은 손가락이 힘겹게 움직인다. 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그의 나머지 어깨가 이제야 입을 연다. 뜨거운 김을 들이마신다. 한쪽 주머니가 흔들리며 찌르르 걸린다.
”휴… 콜이네…“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보는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의 손자국을 따라 차가워진 캔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쓰레기통에 휙 던진다. 그는 쿵 하고 나간다. 그가 스치고 지나간 내 옆은 그대로 얼어있다. 녹다 만 그는 끝내 저편의 삶. 그의 생이 부름에 답하고 사라진다. 넘어간다. 아니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우리의 뉘앙스에 적절하다.
이곳에서 벗어난 밖은 용서를 모른다. 화해하는 법이 없다. 흑 아니면 백.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사이에 대충 걸쳐진 다리는 버틸 수 없다. 그 끝은 기필코 슬픈 결말이 된다. 지금 내가 앉아 느끼는 온기. 이 작은 사치는 밖에는 없다. 너머와 안을 오가는 내 눈은 냉장고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등을 탄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커다란 초록색 바구니에서 오늘 자 상품들을 진열 중인 그녀의 등을 본다. 등을 보다 어깨를 넘는다. 회색 니트를 입은 팔은 위아래를 오가며 버려질 것들과 팔릴 것들을 나눈다. 나는 여태껏 그 두 경계에 있다. 유통기한을 살피는 눈동자가 필요와 불필요의 도장을 찍는다. 나는 어느 쪽에도 붙지 못한다. 불러주지 않는다. 불려 가지 않는다. 그런 나는 쉽게 앉아 있기 어렵다. 파란색 쓰레기봉투에 던져지는 것들은 마침표의 꼭지가 된다. 스치고 여민다. 꼬이고 풀린다. 알지 못한다. 구분하는 뒷모습과 나는 서로 모른다. 외면하고 각자의 하루를 걷는다. 틈으로 마주친 간격은 마모되지 않는다. 스치며 비비고 엉키고 겹치는 것이 사이다. 그런 사이가 만드는 게 무얼까 결국은 비껴갈 문턱이다. 질문은 과하다. 알고 싶지 말자. 법이란 없듯 방법은 숨는다. 혼자 중얼거리는 이런 말들도 결국 쓰레기봉투 행이 될 것들이다. 쳇.
“때링~띵”
거대한 유리문 아래 서 있는 문턱을 넘는 건 간단하다. 지금 들어온 저 낯섦처럼 가볍다.
아르바이트생이 문턱에 외친다.
“어서 오세요.”
던져진 말은 문턱 너머 차가운 계절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