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된 세계
세르바부스와 루카르가 사라진 뒤, 황궁은 구조만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정적인 혼돈을 맞이했다. 탈날것이 없었기에 당혹감만 간직한 채로 소란도, 공백도 없이 빠르게 회복되어 안정을 찾아갔다. 그저 최종 권한을 가진 황제라는 계급의 부재만이 구조의 끝자락에서 미세하게 감지될 뿐이었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자들은 회의에 올릴 보고들을 받아 추리고 통합하던 황궁의 실권자들이었다.
그들은 중심이 사라진 채 유지되는 질서가 오래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황궁이 급격하게 무너질 거라 생각했기에 최고 실권자가 없습에도 구조가 스스로를 유지되고 있다는 깨달음은 안도이자 공포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예감은 빠르게 하나로 모여 의견을 도출해 냈다. 그들에겐 새로운 황제가 필요했고 그 인물은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카일리스로 지목되었다.
황제가 되어주길 바라는 실권자들의 요청이 전달되기 전부터 카일리스는 미리 라온델, 세바스티안과 함께 이를 대비해두고 있었다. 셋은 세르바부스와 루카르가 사라질 상황만을 가늠하지 못했을 뿐, 이미 자신들의 회동에서 포르투나 엘렉티오가 미래에 향할 방향성의 답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미래를 향한 회동.
첫 회동 이후 카일리스가 답을 하기로 한 두 번째 회동에서 토론은 보다 분명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 방향은 이 대륙에서 추구해야 할 진정한 자유에 대한 논의였다.
진정한 자유가 현 황궁처럼 허락의 형태로 주어지거나 구조를 감당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 현재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자유의 형태에 대한 물음임과 동시에 황궁의 자유가 정상적인 구조인지에 대한 토론이었다.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방향이 정해짐과 동시에 각자가 정의할 자유를 찾을 밑거름은 충분히 되었다.
세 번째 회동에서는 각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의견을 하나로 모이기 어려움을 인정해야 했다. 자유를 정의하는 것은 예상보다 복잡했고 공통된 자유보다 각자가 바라보는 자유의 형태만이 또렷해졌다. 논의는 자연스럽게 거꾸로 미래의 방향성이 아닌 본질을 향했고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흘렀다. 그렇게 도달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자유로운 대륙에서, 왜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아직 누구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도달하 토론의 끝맺음에는 자유를 추구하기에 앞서, 본질에서 시작되는 방향부터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회동에 모인 각자 추구하는 자유가 아니라, 이 대륙의 사람들 각자가 자유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네 번째 회동에서는 드디어 자유의 방향성에 드리워진 모호함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각자가 흩어져 바라본 자유는 하나를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했다. 그들은 자유를 정의하려는 태도보다 자유를 감당하려는 태도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되려 자유의 질이나 범위가 넓어질수록 질서는 더 정교해졌다. 세 사람은 토론을 통해 그것을 선택이 아닌 구조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유에 책임을 지고 누군가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았다.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얻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책임을 떠안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쌓이자 누가 앞장서지 않아도 서서히 결론이 드러났다.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도 갈망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자유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기에는 자유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미 세 사람 바로 옆에 밀접해 있는 알베르트만 보아도 그렇다. 세바스티안에게 자유롭게, 동등하게 지내자고 제안을 받았음에도 기꺼이 궂은일을 맡아 보좌하는 삶을 선택했다. 반면 제안은 했으나 세바스티안은 그런 알베르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대우를 받는 것이 익숙했다. 이 둘은 함께하면서 자유를 나누려 시도했으나 서로가 바라보는 자유가 달랐기에 삶의 자리는 쉽게 섞일 수 없었다.
카일리스가 다른 대륙들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풍경은 이보다 더 복잡했다. 제도적으로 자유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대륙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안정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비슷한 제도가 있는 다른 대륙에서는 선택할 수 없는 압박과 구속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자유를 원하는 이와, 자유를 원치 않고 살아감에 만족하는 이로 나뉘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자유에 대한 논의의 끝에 다다르자 세 사람은 합의에 가까운 하나의 문장에 도달했다. '자유를 강요하는 대륙이 아니라,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대륙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이었다.
다섯 번째 회동. 고심을 끝내고 확고히 방향을 정한듯한 라온델이 앞서서 말을 꺼냈다.
"자유의 대륙이라고 말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오?"
"어떤 처지 말이지?"
"유령께서는 모를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오. 당신이 한때 군부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계급, 태생, 핏줄의 구조가 작용한 것 아니겠소?"
세바스티안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맹이가 빠진듯한 라온델의 말은 와닿지 않았다. 그가 보았을 땐 라온델과 카일리스는 똑같은 출발 선상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각자의 선택에 의해 현재의 위치가 정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라온델을 배려했다.
"자네 의견을 더 들어보겠네."
라온델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태어난 환경에 따라 어떤 선택은 시도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켜온 계급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구조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정해진 계급에 의해 나처럼 실력이 있어도 변변치 못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소."
"주어진 기회가 적다라.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환경의 문제다. 그리고 비단 계급만의 문제는 아니지. 그와 엮여있는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가? 부모가 다른 것을. 이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다.”
"그렇다면 묻겠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모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르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유라 정의할 수 있겠소? 지금의 구조는 태생이 출발을 정하고, 그 출발이 다음 기회를 예측하게 합니다. 운 좋게 얻은 기회마저도 한 번 밀려나면 다시 증명할 자리가 거의 없소.”
"자네가 말하는 구조는 언제나 흥미롭군. 그러나 환경의 문제라는 건 태생의 문제와도 같지. 계급을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닐세. 카일리스를 보게. 자네와 똑같다면 똑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으나 이미 황궁의 중요 인물이 됐지 않은가?"
세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라온델 또한 그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주장한 이유는 자신이 살아오며 직접 겪은, 살아온 삶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아무리 탁월한 방향성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이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그 선택의 자유 말이다.
"... 모든 걸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태어남이 출발과 환경에 영향을 주더라도, 그 이후의 선택까지 미리 고정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지 않겠소?”
"유령이 되기 전, 내가 전쟁광이 되어 군을 이끈 건 핏줄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 신체가 비루해 군을 깔끔하게 통솔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그 몫을 해준 귀인이 알베르트지 않은가. 자네의 심정은 이해하네만 태생이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일세."
논의를 신중히 듣던 카일리스가 순간의 틈을 파고들어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황자님의 말씀처럼 태생을 넘어서 변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처럼 계급에 의해, 계급의 세속에 의해 사람들이 자유를 잃은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은 모두가 할 수 있는 자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이미 알고들 계시겠지요. 지금 세르바부스 황제께서 권력으로 황궁과 대륙을 통솔하고 있으시지만 자유를 추구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추구하는 방향이 저희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 직면한 문제처럼 자유에는 분명히 질서가 필요합니다. 계급에 의해서든, 태생에 의해서든, 똑같은 자유를 주어도 결국 모두가 동일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유를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환경,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압적인 자유를 주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선생님?"
"그래, 자네도 나도 선택할 기회는 있었지. 어찌 보면 그 뒤에도 확실한 기회가 있었어. 다만 내가 잡지 않은 거야. 내가 원하는 자유는 지금 이곳에 있으니까 말이지. 황궁에 있는 자들은 자유를 필요로 하면서 스스로 강압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 자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네."
"황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계급이 유지되는 이유는 준비된 자에게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를 맡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지. 질서를 유지하는 건 모두이지만 질서를 컨트롤하는 사람은 언제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라네. 그러나 자네 선생의 말처럼 타고남이 아닌 계급에 의해 준비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구조라면, 그건 자유의 대륙이라 부르기 어렵지 않겠나. 우리는 지금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대륙을 만들기 위해 만남을 갖고 있어. 그러니 적어도 계급이 아닌 직업으로 바뀌어야겠지."
"그렇습니다. 선생님과 황자님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목적을 함께 생각해 보니, 우리의 목표를 확고히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 명의 힘으로 황궁의 견고한 구조를, 이미 익숙한 그들 모두에게 뜻을 같이하 자고 하면 어디선가는 탈이 날것이고 모두가 원하는 자유는 이룰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반복되던 황권을 쥔 자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의한 대륙의 흐름을 황권이 아닌 대륙의 대표자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고 스스로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은 후세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유의 대륙이라 불리는 포르투나 엘렉티오 안에도 아직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사람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가 없는 것이 익숙한 그들을 강압적으로 바꾸는 대신 앞으로 태어날 후세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겁니다. 어떤 자유를 선택할지는 그때의 그들의 몫이지요."
세바스티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서 곰곰이 고민하면서 말을 뱉었다.
"황권이 아닌 대륙의 대표라. 현 황권은 책임도, 권력도 한 점에 모아두는 방식이지. 마치 황제를 잡아야 끝나는 게임. 그 책임의 무게를 분산한다면 질서가 흔들릴 거야."
의미심장하던 표정은 점차 웃음으로 번졌다.
"그러니 황권을 쥐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 황권이 한 점으로 모으던, 독점하던 방식을 대표자라는 구조로 만들어 서서히 우리의 목표로 옮겨오자는 거군. 지금 대륙의, 사람들의 질서는 무너트리지 않고 다음 세대의 선택지를 넓히는 방식이라. 재밌겠군."
"그렇습니다. 황제와 같은 대표자가 독단적으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고 싶은 모두가 대륙의 방향을 제안하고 대표자는 제안을 추려 지키는 결정을 하는 방식입니다."
"하 정말 기가 찬 발상이군. 평생을 설계를, 그리고 완성의 욕망을 버리지 못할 나에게 너무 큰 곤욕 아니겠나? 그래도 그 안에서 완성되는 것들이 있겠지. 완성이 아닌 과정이라.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이 있다면 자네를 믿고 기꺼이 동참하겠네."
그들은 안개에 갇힌 듯 풀리지 않던 문제를 드디어 해결했다. 그들의 의지는 이날, 현시대에 머무를 자신들을 위한 세상이 아닌 미래의 후세를 위한 세상으로 종결되었다. 다만 갇혀있던 안개가 사라진 것인지 안개 안에서도 빛나는 빛을 발견한 것인지는 후세가 되어야, 후세의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회동에서는 앞으로 대륙의 구조를 어떻게 구성할지, 황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황제와는 어떻게 지낼지 등의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논의는 결국 황제의 의중을 알아야 하므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카일리스는 황제가 자신을 다시 황궁에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때 했던 약속만 보아도 이미 전과는 달라졌다고 생각했기에 만남을 가지려 했다. 그런데 자유에 대한 의중을 묻거나 토론은 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황궁에 다시 받아줄 때 했던 약속처럼 보고를 위해서라도 만남을 가지려 했음에도, 아무리 수소문을 해보아도 언제부턴가 황제는 황궁에서 족적을 넘어 자취까지 감추었다. 황제와 우리의 뜻을 조율하길 바랐던 카일리스는 황궁에 머물러야 할 황제의 소식을 대신관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 부분은 세 사람 모두가 동의했다. 세 사람이 의견을 모으자 루카르 대신관의 행동거지가 너무도 잘 추론되었다.
겉으로 내색한 적은 없으나 이상하리만치 세르바부스 황제를 찬미하는 듯했던 그가, 황제의 부재에 어떠한 동요도, 대응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큰 괴리감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는 너무나도 괴상했다. 그래서 세바스티안은 황궁 안에서의 상황은 파악할 수 있으니, 그 외 황궁 밖에서의 루카르의 거취를 알기 위해 알베르트에게 뒤를 밟으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계획되었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예정되었던 몇 번의 회동들을 끝 맞추기도 전에 황제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발견하게 됐다.
마지막 회동은 더 이상 사유의 자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으로 대륙의 변화를 위해 준비가 필요했던 회동이었기에 죽음을 애도하며 머무르기보단 바로 변화를 도모해야만 했다. 먼저 루카르를 신속히 심판한 뒤 곧바로 세바스티안이 황궁에 얼굴을 비췄다. 죽은 줄 알았던 자의 귀환. 알베르트와 함께 선 세바스티안의 모습은 카일리스의 복귀보다 훨씬 큰 파장을 일으켰다. 루카르의 계략에 가담해 둘을 죽음으로 몰았던 자들에게 전쟁광의 귀환은 공포 그 자체였다. 황제와 자유의 대륙에 대해 조율하려던 세 사람의 계획은 일부 흐트러졌으나, 목표는 변함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죽음이라는 불운이 전화위복이 되어 명분을 얻었고 좋게 풀려나갔다. 황제가 아닌 대표자로써 집정관이란 명칭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에는, 집정관이 아닌 황제로 자리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나 세바스티안의 위엄으로 손쉽게 해결됐다. 과거의 기억이 있기에 모두가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의 회동에서도 그렇고, 황제의 죽음 이후의 황궁에서도 집정관이란 계획을 처음 모의했을 땐 카일리스를 집정관으로 앉히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카일리스 스스로가 극구 반대했다.
세 사람의 역할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전장에서 설계하던 방식을 그대로 정무에 활용해 전장이 아닌 대륙의 흐름으로 바꿔서 정교하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카일리스는 자처해서 포르투나 엘렉티오에 속해있는 왕궁과의 교류나 다른 대륙과의 교류 등 기존에 하지 않았던 구체화된 교류를 중점으로 일을 맡기로 했다. 라온델은 자신이 꿈꾸던 최상의 작업실을 갖추고 신기술과 기술들의 안정화, 그리고 기술에 대한 교육과 교류마저 마다하지 않고 모두 맡았다.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중심부 시장.
이른 시간, 자리의 천막을 걷는 사람 중에 한 명, 필리오네스라는 노인이 상념에 잠겨있다.
대륙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후 가장 먼저 나를 다시 찾은 이는 여사제였다. 그녀는 자신이 혼자 간직하고 있던 신의 계시를 말해주었다. 엘렉티오의 핏줄을 가진 이가 황제가 되어야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나. 과연 지금 변화한 황궁은 신의 계시처럼 위기가 지나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인가, 아니면 엘렉티오의 핏줄이 이어받지 않았기에 위기가 찾아온 것인가. 신의 계시는 답을 알려주거나 내리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만 같다. 신은 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전하고 떠나는 것일까? 신이 있다면 지금의 상황을 묻고 싶다. 지금의 대륙에는 위기가 찾아온 것인가? 아니면 위기 후 새로운 세상이 찾아온 것인가? 뭐 신이라면 알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의 대륙을 위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주어진 상황이 같아도 받아들이는 것은 '나'니까 말이다.
지금 대륙의 분위기는 내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큰 격변을 맞이한 것 같다. 언뜻 보면 사람들의 하루 일과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의 사고가 달라 보인다. 마치 자유를 모르던 이들이 자유를 알게 되었고 자유를 필요로 하는 이와 필요로 하지 않는 이가,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이와 노력하지 않는 이가 혼합됨을 많이 느낀다. 마치 자유의 대륙이라는 명칭이 아닌 진정한 자유의 대륙을 보는 느낌이다. 같은 바람이 불어와도, 변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노인네의 마음에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달해 준다.
한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던 카일리스가 오랜만에 나를 찾았을 땐 나름 재밌는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이야기가 재밌기보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카일리스가 신나 있었다고 해야 할까. 황궁의 사람들은 격변기를 맞아 계급이 아닌 직업을 정정되었다. 다만 왕궁에까지 강요하진 않았다. 그래서 황궁 그리고 자신이 주요하게 맡아서 하는 일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황궁, 왕궁, 대륙의 모든 이들을 설득하는 일 이란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 어우러짐을 중점으로 잡고 있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우리 세대를 위한 자유가 아닌 후세대를 위한 희생을 한다고 표현했다. 왜 현세대가 아닌 후세대를 위하느냐 물으니 "지금 심은 씨앗은 현세대에 만개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모두가, 여태까지 시도하지 못했는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가 심은 씨앗이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언제 만개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 심고 있는 씨앗은 분명히 다음을 위한 발판, 미래의 사람의 위해 전승이 될 것입니다."라며 아주 즐겁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떠들어 대던 중 그는 오랜만에 시상이 떠오른다며 시를 노래했다.
"생명이 머무르는 자리
피고 지는 꽃을 보았노라
새로운 탄생을 노래하며
반복되는 인생을 즐겼노라
밀이 뿌려진 자리
밀의 탄생을 보았노라
이 땅에 무엇을 심으리오
나의 뒤엔 무엇을 남기리오
꽃의 탄생엔 시작과 끝이 담겼으나
꽃이 빛나는 순간, 한순간이라네
순간을 빛나기 위해 살 것인가
순간이 아닌 반복됨을 위해 살 것인가
내 이 자리에 꽃이 될지, 밀이 될지, 흙이 될지는 모르오.
다만 그대가 누구든 내 뿌린 씨앗은 자네를 위한 것일세"
그가 머물고 간 떠난 자리의 감상은 여운이 되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지금의 세대는 선택되어진 자유가 아닌 선택 할 수 있는 자유를 모두가 누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과정은 그저 발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허울만 쫓는 자유가 아니 인간 존엄성의 공존이라는 목표가 있기에 발판이 되어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 세대이다. 인간으로 태어남에 있어 허락된 자유는 언제나 한정적이다.
삶이 있고 자유가 놓이는 것이지 자유가 놓이고 삶이 놓이지는 않는다. 내가 보지 못할 앞으로의 세상은 정해진 운명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모두가 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세대를 맞이하던 이곳의 시장에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오늘의 해가 뜨고 오늘의 해가 진다. 그러나 해가 변함없더라도 관점을 바꾸면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다를 것이다. 해를 보며 같다고 말할 것인가, 다르다고 말할 것인가. 현재의 상황을 위기라 말할 것인가, 새로운 시작이라 말할 것인가. 이 모든 받아들임의 결정은 신이 아닌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심은 씨앗 위에서 다음 해를 맞이한다.
월드카드 키워드 - 완성, 결실, 조화
완성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내가 원하는 완성된 삶이 아닌
인류가 완성할 삶의 과정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삶이 선택의 연속이냐 물으면
카일리스도, 라온델도, 필리오네스도 그 누구도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 확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선택의 의해 현재가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