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욕구
의미부여에 있어서는 의미 없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의미 없음에는 양면성이 있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의미 없다는 의미부여를 할 것인지 의미 있다는 의미부여를 할 것인지로 나눠진다. 의미 없는 것 자체만으로 선택사항이자 의미 없는 것에 어떤 의미부여를 했는가로 나눠진다. 애초에 모두가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받았고 모든 것에는 의미부여가 되어있기에 아무리 생각 없이 있어도 인식하지 않거나 못할 뿐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만약 드라마에서 이미 마음이 떠난 연인을 붙잡는 장면을 보고서 의미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의미와 목적이 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말이 된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 그 행동자체의 의미가 없다, 부질없다는 말은 맘처럼 되지 않은 의미이며 그 행동에는 부질없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미 없다 말을 말버릇처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의미 없음은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지칭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미 없는 무언가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전달되는 말 자체는 의미 없는 무언가인데 그들이 말하는 의미 없는 무언가는 실제로 의미 없는 게 아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의미 없음의 양면성 중 하나의 사례이며 선택사항이 된다. 그들이 말하는 의미 없는 일에는 일과 관련 없는 취미를 지칭할 때가 많고 그중에는 산책, 샤워, 단순반복작업도 있다. 이는 유레카를 외치는 상황을 만들지 않더라도 뇌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뇌의 휴식을 위해 의미 없는 일을 하라는 것의 양면성에는 뇌가 휴식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일과 관련 없고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는 그것 자체가 이미 그들에겐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의미 없는 무언가가 아닌 실제로 더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통해 양면성이 있는지 알아보자.
의미 없다는 일이 되려면 목적, 목표가 없는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 익숙한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켜는 것으로 접근해 보자. 목적, 목표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이미 볼 것은 다 봤다. 그럼에도 유튜브를 들어가서 새로고침을 하고 스크롤을 내려가며 알고리즘에서 볼만한 영상이 있는지 하염없이 확인하다가 없으면 SNS로 넘어가서 똑같이 스크롤을 내리고 새로고침을 반복한다. 그 와중에 메신저를 주고받거나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새로고침을 하는 무한루프에 빠진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은 둘로 나눠서 알아보겠다.
1. 의미 없는 무언가도 의도가 있으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들에게서 알아봤듯이 이 모든 과정이 취미나 휴식이라는 의도가 있었고 정해놓은 시간까지 있었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된다.
2. 의미와 의도가 없었는데 운 좋게 만족할 만큼의 영상이나 내용을 찾게 되고 마치 이것을 위해서 계속 새로고침 했다는 합리화를 한다면 없던 의도와 의미가 생겨난다. 반면 똑같이 의도가 없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운이 나빠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무한루프를 하다가 포기한다면 정말 의미 없는 일에 도달할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상황은 운이 좋든 나쁘든 중독증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 또한 중독에 의한 증상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들의 말처럼 의미 없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보냈음에도 의미 없음에 대한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1번의 경우 앞서 얘기했던 것과 유사하며 2번의 경우는 의미 없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의미부여를 할지와 의미가 없다고 부여할지의 선택사항으로 파생된다. 중독증상이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면 핸드폰을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길 것이고 중독증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한다면 의미 없는 일로 여길 것이다. 다만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의미 없다고 여기면서도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과 의미 없음에도 괜찮은 의미 없음과 조심해야 할 의미 없음이 나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장래의 꿈을 동화의 교훈에서 배운다면 착하게 사는 것, 성실하게 사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등으로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 동화에서 배운 꿈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동화가 아닌 현실을 배우고 꿈이라는 단어는 목표와 목적의 형태로 변해간다. 목표를 결과의 방향성, 도달해야 하는 최종결과로 보고 목적을 과정의 방향성, 목표로 가는 과정과 의도로 봤을 때 꿈은 목표와 목적이 된 후에는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이뤄내야만 하는 것으로 변한다. 하지만 꿈이 없는 학생부터 정년퇴직하고 별다른 목표와 목적 없는 사람까지 꿈, 목표,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사회의 의미부여가 꿈, 목표, 목적이 뚜렷하고 현실적이고 거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의 부작용이다.
과연 현실에 밀접하지 않은 꿈과 목표는 어린 시절에만 적용될까? 현실을 알면 바꿔야만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어린 시절 추상적이어도 되는 꿈은 나이가 들어도 추상적이어도 된다. 목표와 목적으로 변해가더라도 추상적이어도 된다. 추상적이기만 하면 현실적일 필요도 거창할 필요도 없는 꿈과 목표는 다시 동화에 도달한다. 동화에 도달하게 되면 다소 추상적일지라도 모든 것이 목표와 목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의미부여는 인지하되 개인의 의미부여로 받아들여도 되는 의문형 의미부여이다. 그러니 생존이라는 목적만 가지고 살아도 무방하다. 작은 목표에서 시작해서 키울 필요도 없이 작은 목표로 살아도 된다. 그리고 아직도 생존이 우선시 되는 사람들은 내적욕구를 생각할 시간은 생겨도 실현할 환경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생존이 보장된 사람의 시점에서는 외적욕구에서 내적욕구로 발달과정이 있기에 목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 수 있으나 그 목표 또한 건강하게 살기, 행복하게 살기, 태어난 김에 살기가 되어도 된다. 심지어 지금은 그렇게 사는 것이 사회의 의미부여보다 더 현실적이다. 사회의 의미부여가 만든 현실적인 기준은 현실이 아닌 꿈보다 더 높은 이상적인 기준이 되어있다. 이상적인 기준에 맞추면 건강하게 사는 것도 행복하게 사는 것도 태어난 김에 사는 것도 너무나도 버겁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회의 의미부여에 맞춰 뚜렷하고 현실적이고 거창한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설령 그것이 타인의 강요나 사회의 강요일지언정 결국에는 스스로가 선택한 의미부여가 될 것이다.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면 거창한 목표만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과 사소한 목표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중 어디에 더 많은 비중을 실어서 사는 게 좋을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선택한 의미부여라는 것이다. 꺾이지 않는 마음, 꺾여도 하는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미부여대로 살아가는 마음이다.
현재 어떤 의미부여하고 있나?
앞으로는 어떤 의미부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