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욕구
의미부여의 시작은 확실한 내적욕구가 되기 전부터 외적욕구와 같이 지극히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을 알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더라도 본능에 충실한 직감, 감각에 의존한 의미부여로 살아갔다. 그러다 사실에 입각한 의미부여를 향해가면서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목숨을 걸고 먹던 것에서 죽음을 통해 먹어도 된다, 안된다고 구분 짓는 의미부여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대부분이 가정과 가설이었다. 이는 실제로 위험한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경험과 의미부여를 통해 워험한지, 안전한지 판단하는 것과 같다. 인류는 이 어려운 과정을 무한반복하며 현재에 도달했다. 현재는 의미부여가 생존과 멀어짐에 따라 직감, 감각에 의존한 의미부여가 생존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중 또한 사실에 입각한 의미부여의 비중이 더 높아졌으며 감각에 의존하던 의미부여는 점차 구체적인 사실로 증명했다.
비가 내리기 전 삭신이 쑤신다거나 무릎이 시린 것을 감각에만 의존했을 때는 주술사, 무당이 탄생하기도 했고 비를 내리는 신의 존재를 믿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단순히 앓는 소리로 여겼을지 모른다. 이것을 사실로 증명해 낸 지금은 비 때문만이 아닌 다른 환경적인 요인과 그에 따른 예방법 더 나아가 병원을 찾아오라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직감과 감각에 의존하던 의미부여에서 가설과 가정을 통해 사실에 입각한 의미부여로 발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림, 문자, 언어를 사용하면서 가능했다. 이 과정을 겪으며 그림, 문자, 언어는 의미부여의 수단임과 동시에 생존수단에 확실히 기여하게 되었다. 현재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뜸 언어에 왜 그러한 상징과 의미를 두는지 궁금증이 생기는데 이것은 지구를 왜 지구라고 부르는지, 왜 둥글다고 하는 것인지와 같은 궁금증이다. 이 궁금증은 무언가를 상징하기 위해 사회가 정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류의 노고와 욕구가 합쳐져 통일하고 정한 것뿐이다. 지구를 다양한 언어로 부르듯이 뭐라고 부르든 어떤 단어든 상관이 없지만 의미부여가 계속 전해져 내려와 그렇게 명시되었을 뿐이다. 말 그대로 지구라고 가정하고 부르다 보니 지구가 되었고 사회에 맞춰 통일하고 정한 것뿐이며 그림으로든 문자로든 언어로든 의미부여를 하고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뭐라고 부를지 보다 일단 부르고 나서 헷갈리는 것을 통일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미부여가 사실을 매개체로 자리잡지 않고 감각에만 의존했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을 거다. 그래서 그런지 의미부여가 내적욕구가 되게끔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아기가 태어나면 의미부여가 내적욕구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조기교육을 시킨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려주고, 앞의 사람을 아빠라고 부를지 엄마라고 부를지 알려주고, 네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듯이 모든 의미들을 알려준다.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 받아들여 태어난 아기에게는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사회가 정한 규칙적인 의미부여부터 양육자가 알고 있는 의미부여, 관계를 통해 배우는 다양한 의미부여들을 습득한다. 양육자가 영어를 알려줄지 한글을 알려줄지 처럼 선택적인 교육과는 다르게 의미부여는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들에게 필수적인 조기교육이다. 이 의미부여교육이 지금은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여기까지 도달하기에 수많은 가설을 증명해 낸 인류의 노고와 인간의 내적욕구가 맞물렸고 그 어려운 과정을 반복해 쉬워진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직접적으로 교육받은 의미부여는 성장해 가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재해석하고 사회의 의미부여 또한 변하기도 하고 재해석하기도 한다.
의미부여를 통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와 재해석이 있을 수 있는지는 노예가 존재하던 시점의 과거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이면서 물건 취급을 당하는 것이 노예라서 당연하다고 아기에게 의미부여를 조기교육하고 아기가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노예는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주인은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기에 노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고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기며 사람과 노예에 대한 의미부여의 변화와 재해석으로 노예제도는 폐지된다. 이는 사회의 새로운 의미부여가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노예제도나 다른 역사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의미부여하는 것 자체가 욕구이며 옳고 그름을 논하기 이전에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는 과정이며 당시의 문화와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의미부여의 재해석은 단어, 언어와 연결되면 개인과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같은 단어라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이것, 저것, 그것, 다의어등이 있고 '어'라는 단어 하나로 수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의도인지, 상황인지, 해석하는지에 따라 의미는 천차만별이 된다. 여기에 인식의 차이가 더해지면 같은 말,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고 의사소통의 부재로 연결될 수 있다.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에 배고파서 먹어야 하는 것인지, 배고프지만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것인지, 다이어트를 해야 하지만 먹고 싶은 것인지, 다이어트 중이지만 먹겠다는 것인지 등 단어에 자신이 가진 의미부여를 담으면 타인은 해석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골치 아프게 묘사하면 오히려 말없이 전달하는 몸으로 말해요 놀이처럼 의사소통이 하는 것이 더 원활하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왜 배고픈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말하면 언어로 더 쉽게 해결될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하지 않고 속뜻이 있는 경우는 몸으로 말해도 똑같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의미를 하나로 합치고 개인이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정답이 있어야 할 의미부여와 정답이 없어도 되는 의미부여를 분리하지 않으면 모든 의미에는 혼동이 생겨난다. 수많은 가정과 가설을 정리해서 도달한 사회가 문화와 역사, 규칙과 법을 만들면서 단어의 의미를 통일시키는 과정은 정답을 하나로 정하기에 정답형 의미부여와 의문형 의미부여를 구분 짓지 않으면 혼동을 피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정답형 의미부여는 사회가 통일해 놓은 단어자체의 의미라던지 과학적, 수학적등의 증명을 통해 정해놓은 진리와 유사하다. 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사람이라는 의미부여가 필요한 것만큼 중요하며 사회의 의미부여라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정해 놓은 통일된 의미부여를 알아가는 것은 세상을 쉽게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의문형 의미부여는 단어자체의 의미는 통일해도 정답을 정해놓지 않은 것에 해당하며 가설, 가정과 유사하다. 또한 사회의 의미부여중에서도 의문형은 정답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사회가 규정한 정답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사회의 의미부여를 인지하고 분리하기 위해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개인의 의미부여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형 의미부여와 개인이 정해야 하는 의문형 의미부여를 인식하지 못하면 정답이 없음에도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따라가게 될 것이고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원하는 게 뭔지, 자신에게 쌓인 의미들이 뭐고 앞으로 쌓을 의미들은 뭔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의미부여 조기교육을 할 때부터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라고 의미부여를 해주지 않는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정해놓은 의미를 따라가는 것은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사는 것과 같고 태어날 때부터 주입받은 의미부여를 자기의 것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혼동의 예를 직업으로 잡으면 직업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가 있는 정답형 의미부여이고 좋은 직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닌 의문형 의미부여이다. 여기서 사회가 말하는 좋은 직업을 자신의 좋은 직업이라고 혼동하게 되면 특정직업을 좋은 직업이라고 규정짓게 된다. 이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의 기준을 먼저 알아야 하며 자신이 원해서 사회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은 혼동이 아니다. 만약 자신의 기준을 모르고 정답형과 의문형을 구분하지 않으면 통일할 필요가 없는 의문형 의미부여임에도 다수가 정해놓은 의미에 휘둘려 대중화에 속하게 된다.
대중화되었던 의미부여의 예를 보면 '가수는 딴따라야', '대학은 꼭 나와야 해', '공무원이 최고야', '성형은 나쁜 거야', '남자는 이래야 돼', '여자는 이래야 돼'등이 있다. 의문형이기에 정답이 없음에도 대중이 주장하거나 권위 있는 사람이 주장하는 의문형 의미부여에 대한 가설은 역사적으로 보면 정말 수없이 많고 현재도 다양한 가설을 만들어 계속해서 의미부여를 한다. 이는 사회의 의미부여와 개인의 의미부여는 바뀔 수 있다는 방증이며 사회의 의미부여가 가설을 만들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과정이 잘못됐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이 혼동을 마케팅으로 이용해서 '이건 꼭 먹어야 해', '이건 꼭 봐야 해'등으로 수많은 사람을 현혹하기도 한다.
사람의 내적욕구가 의미부여이기에 모든 것에 의미부여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혹시나 없는 게 있을까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더라도 일상에 녹아들어 의미부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뿐 모든 것에 의미부여가 되어있다. 그리고 만약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발견한 순간부터 의미가 생길 것이고 '뭐야 의미부여 안된 게 있잖아?'라는 반응으로 머무르지 않고 의미부여되지 않은 그것에 무언가 의미부여를 하려고 할 것이다. 새로운 행성을 발견해도, 새로운 기술을 발명해도,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도,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도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구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지구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존재를 알고 나서 지구가 되었고 행성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것은 아직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부여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에도 미지라고 정의해 놓았다. 결국 존재를 알고 있는 모든 천지만물에는 의미부여가 되어있다. 다만 모두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는 의미부여가 되어 있지 않겠지만 과연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가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