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과 배려
'차별 없이 평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모두의 평등 이야기를 했으나 혐오적, 증오적, 부당한 차별을 직접 겪은 사람이라면 차별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낯설 수 있다. 이러한 낯섦을 완화하기 위해 모두의 평등이 아닌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개인이 평등을 추구했을 때의 상황을 가정하고자 한다.
[차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가족이든 친구든 직장동료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평등하게 대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 A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매력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A가 결혼을 원하게 되자 난관에 부딪쳤다. A가 가정을 꾸리기 위해선 결혼할 상대와 그 외의 사람을 차별해서 결혼할 상대를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 물론 A를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상관없겠지만 모두를 똑같이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그건 좀 아니다' 싶은 행위, 행동마저도 똑같이 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A에게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에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다.]
A처럼 모두를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개인은 자신이 누군가를 더 특별하게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며 애초에 사랑, 결혼에 다다르지 않아도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고 싶었던 A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싶다면 남들처럼 차별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의 배우자가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 특별하게 대하지 않고 '나'에게 하는 행동을 어딜 가든, 누구에게든 똑같이 대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처럼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 혹은 차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차별을 하면서 차별하지 않는다고 정당화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차별되어 있다.
모두가 차별을 하고 있는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차별을 없애고 평등하고자 주장하는 것은 입맛에 따른 평등을 이용하기 위한 사람이거나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현혹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현혹은 마치 끌어당김의 법칙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현혹하는 것과 유사해서 약장수 효과처럼 모르면 속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러한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 올바른 평등을 추구해야하며 현혹되어 생기는 평등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은 강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차별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동의하지 않는다면 차별 자체를 부당한 차별로 인식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만약에 아직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역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를 바란다.
'부당한 차별을 제외하면 인간관계, 이해관계에서 차별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부당한 차별만 아닐 뿐이지 모두가 관계와 상황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다. 이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평등을 알아야 하며 관계의 평등을 알게 되면 차별의 존재를 동의하지 않던 사람도 관계에 있어서 차별이 필수적이고 관계의 평등에서의 차별과 부당한 차별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차별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상기한 상태로 정당한차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관계의 평등에서는 보다 완만한 인간관계, 이해관계를 위해서 차별이 필수적이고 관계의 평등에 있어서 차별은 관계에 따라 정당하게 차이를 둔다는 것이다. 정당하게 차이를 두는 것에 인간관계를 대입하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관계든 상황이든 상관없이 평등하거나 공평하게 대하려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가 관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는 것을 알수있다. 이는 가족과 있을 때, 친구와 있을 때, 학교에 있을 때, 직장에 있을 때 등 관계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고 친밀도, 호감도에 따라서 다르고 갈등이 있거나 경쟁구조일 때도 달라지며 '내'가 처해진 상황뿐만 아니라 타인이 처해진 상황, 서로가 처해진 상황 등 모든 이해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모두를 똑같이 대하지 않고 차별을 해야만 그에 따른 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 형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차별이라는 단어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부당한 차별이 문제시되고 있다는 것이고 관계에 있어서 모두가 하고 있는 정당한 차별은 나쁜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평등에서 하는 차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관계의 평등에서 하는 정당한 차별도 사회에서 정한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평등이 있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고 최소한의 평등을 위해서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향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평등에 어긋나는 혐오적, 증오적, 부당한 차별은 개선해야 하고 정당한 차별은 존재해야한다. 그리고 관계의 평등에서도 완전하고 완벽한 평등과 차별은 없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에서 맞춰 평등과 불평등, 정당한 차별과 부당한 차별을 분별하는 것과 객관적인 평등과 차별, 주관적인 평등과 차별을 분별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차별은 정당한 기준을 잡기 위해서 존중과 배려를 하기 위한 방향으로 존재해야 하며 정당한 차별임에도 이해관계, 인간관계에서 기분이 나쁘거나 서운하거나 존중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은 관계가 상대적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인정해야한다. 그래서 관계에 있어서 '내'가 정한 정당한 차별 또한 '내'가 생각하는 정당한 차별만을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소통을 통해서 서로의 기준을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
차별이 아닌 부당하다는 인식에는 차별을 당해도 차별이 아닌 부당함으로 인식하는 것과 차별전에 부당함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인식 또한 차별과 부당함을 잘못인식하는 것으로 차별을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에 자신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여기면 오히려 정당한차별까지도 부당하거나 불합리하다고 여길수 있다. 이는 이러한 부당하다는 인식도 차별처럼 부당한 것과 정당한 것을 구분 지을 수만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으나 구분 짓지 못했을 때는 차별을 잘못인식 했을 때보다 더한 문제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성차별에 대입하면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일부는 부당한차별에 대한 것뿐만 아닌 정당한차별도 문제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부당한 차별과 정당한 차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부분임에도 차별중점이 아닌 차별과는 무관하게 '이 집단의 행동은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불쾌했으니 우리 집단은 차별을 당했다!'라는 부당함을 중점으로 정당한 차별도 우리 집단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차별이 아닌 부당하다는 인식을 우선시한 상태로 '내'가, '우리'가 느끼는 부당함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차별을 이용하는 것으로 부당한 것과 정당한 것을 구분 지을 마음은 없고 정당성을 부여할 생각밖에 없어서이다. 그리고 차별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이런 주장은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이용한 역차별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한 끝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차별에 대한 논쟁은 잘못된 차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은 상태로 부당함이 아닌 차별을 중점으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가야 하며 논쟁의 방향성은 차별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닌 부당한 차별을 이해와 존중, 배려를 통해 개선하는 방향성으로 잡아야 한다.
존중과 배려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권보다 평등을 앞세우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미 인권에 대한 기틀이 마련되어 있고 인권보장을 위한 방향성이 있는데 인권이 아닌 평등을 앞세워 주장한다는 것에 대한 내막을 알기 전까진 제대로 된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필자 역시 내막에 대해 완벽하게 조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나마 내막에 가장 근접한 것은 평등을 앞세워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자신이 주장하는 인권이 존중과 배려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평등이 존중, 배려와 같아 보이는 것일 뿐 속사정을 알고 나면 평등에 목적어를 가장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상 확연히 다른 맥락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권과 존중이 아닌 평등을 주장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면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주장함으로써 발생하는 이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차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이용해서 '네 편 내 편'을 나누어 놓고 싸움과 분란을 만들면서 발생하는 이득과 잘못된 인식을 주입시킨 후 '내 편'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손쉬워지면서 발생하는 이득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조사되지 않았기에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며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닌 혹시나 하는 생각이다.
그럼 이제 혹시나 하는 생각은 접어두고 차별을 존중과 배려의 방향성으로 보기 위해 성차별, 성평등을 성존중, 남녀인권의 방향성으로 본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겠다. 먼저 부당한 성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옳으나 현재의 성차별은 부당한 성차별을 다루기보단 '네 편 내 편'을 나누는 성갈등을 유발해 서로 간의 혐오감을 형성하는 형태를 더욱 많이 띠고 있다. 그러한 형태로 여성이 부당한 성차별을 당했으면 여성인권보장을 위한 개선방안을 주장해야 하는데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나누는 차별중점이 아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남성의 잘못만을 주장하거나 여성이 당한 부당함만을 강조한다. 물론 논점에서 어긋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이유에는 한국의 잘못된 토론문화도 한몫했겠지만 토론이 아닌 경우에도 대외적으로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결국 잘못된 차별의 인식에서 파생되는 성차별, 성평등에 의해 사회가 여성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 싸움을 만들고 부추기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치 싸움이 끝나면 안 되는 것처럼 여성인권보장이 아닌 여성인권차별대우를 요구하고 새로운 이슈만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은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보다는 여성과 남성을 대립하게끔 만들고 싸움을 부추기는 행동을 더 많이한다.
잘못된 차별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도 눈 가리고 아웅에 휩쓸려서 유행처럼 이슈에 눈을 돌리게 되고 부당한 성차별과 역차별 사이에서 뭐가 맞는 건지 왜 이런 건지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가 없다. 애초에 성존중과 남녀인권으로 기틀을 잡아야 하는데 성차별과 성평등으로 본질을 흐려놨기에 시작부터 어긋나 있는 문제라서 이후에 파생된 문제는 해결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시작이야 어긋났어도 파생된 것에서부터 바로잡을 수도 있으나 일부러 본질을 흐려놓는 것처럼 문제해결의 초점이 아닌 대립과 싸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 이런 논란과 분쟁을 만들며 지속적으로 이슈화시키는지에 대해서 확답을 할 수는 없으나 차별에 대한 잘못된 인식까지 더해져 세뇌당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어긋난 본질을 생각하면 문제해결은 과정이 어렵지 방향성을 잡는 것은 굉장히 쉽다. 문제해결의 방향성을 차별, 평등의 방향성이 아닌 존중과 인권의 방향성으로 보면 된다.
부당한 성차별만 놓고 보면 한쪽의 권리를 주장해서 서로의 권리를 동등하게 할 수는 있으나 현재 이슈화된 성차별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부당한 성차별을 인용해서 필요 이상의 권리를 요구하고 역차별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해결하기 위해선 역차별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 부당한 성차별과 현재 이슈화된 성차별을 합쳐서 존중과 인권의 방향성으로 바라봐야 한다. 성차별을 존중과 인권의 방향성으로 바라보면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여성의 인권이 침해당한 부분에 대한 예시를 들고 그에 따라 권리를 부여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존중받고자 하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에 따라 남성의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남성이 존중할 수 있는 부분을 받아들이고 역차별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존중받고자 하면 된다. 그렇게 '나'의 권리와 인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상대의 권리와 인권도 생각해서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면 '내가 어떤 권리를 얻을까?'의 고민만을 하지 않고 '나는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를 필두로 '나는 어떤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향성은 비단 성차별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차별문제들에 해당하며 평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인권을 보장받기 위함이 먼저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차별의 잘못된 인식이 사라진다면 차별개선의 제대로 된 방향성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차별금지법'대신에 의례상 '서로존중법'을 주장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차별 없이 평등한 사회는 문법적 오류가 있어 불가능하지만 부당한 차별 없이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는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다.
부당한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존중과 배려의 방향성을 향하되 권리와 의무의 비중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한다. 이 균형이 흐트러지면 권리만 있고 의무가 적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살아왔기에 당연하게 여길수 있거나 어차피 의무를 다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내세울 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여겨서 권리와 의무의 비중을 맞춰야 할 이유 자체를 모를 수가 있다. 이것을 당연하게끔 여기게 만들어주는 것은 권리가 양극화되어 권리가 적은 집단이 적은 권리로 의무만을 다해온 불평등을 감수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에 적은 권리로 높은 의무만을 감수하는 집단이 사라지고 모두가 권리만을 주장하며 의무를 다하지 않게 되면 사회는 무법지대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권리만 강조되면 서로 존중해야 할 의무가 줄어서 '내'가 불편하니 '너'가 바뀌라는 상호 대립 관계 형성밖에 되지 않고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이득을 취하고 악용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소수자, 약자일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소수자, 약자가 아닌 돈, 지위, 권력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권리와 의무의 불평등이 형성되면 처음에는 차별과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기에 모순된 합리적 차별을 주장하는 집단은 소수자, 약자를 자청한 집단이겠지만 언젠가는 가진 게 많은 집단에서 가진 게 많으니 그만큼의 권리를 더 주장할 수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 합리적 차별에 더 많은 힘이 실릴 것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권리와 이득에 눈이 멀어 당장에 모순된 합리적 차별로 권리와 이득을 챙기면 서로 권리만 주장하는 사회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가진 자들이 모순된 합리적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전처럼 의무만 있고 권리가 줄어든다면 결국 또다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의 비중이 커지는 사람은 소수자, 약자, 힘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권리의 비중이 커지는 사람은 돈, 지위, 권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결국 부당한 차별, 불평등을 개선하고 사회적으로 권리와 의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권리만 낮거나 의무만 높은 한쪽 집단에 치우쳐 권리를 형성하거나 의무를 없애서 불균형을 맞추려는 것이 아닌 시작부터 각 집단의 권리와 의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쪽의 권리만 높이거나 의무를 없앰으로 무법지대를 형성하는 경험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한 사례에서 끝내야만 한다.
[지위, 권력, 돈이 있는 사람의 반복된 언급으로 자칫 오해할 수 있으나 그들이 잘못됐다는 일반화가 아니라 그들 중 비리, 부조리, 부당함을 만들고 불균형을 조성하는 일부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다만 권리에 비해 의무가 없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법에 구애받지 않고 정당화할 확률이 높다는 일반화는 가능할 것이며 부당한 차별을 부조리, 비리의 범주로 놓고 보면 사회적으로 더 커다란 불평등한 구조를 만드는 것은 돈, 지위,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할 것이다.]
차별의 양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와 차별함으로써 다름을 받아들이고 존중과 배려의 방향성으로 차별이 존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차별이 존재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 차별이 어떤 방향성으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차별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잘못된 방향성으로 휩쓸리면 차별에서 파생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없는 반면 차별이 무엇인지 인지한 채로 잘못된 방향성으로 휩쓸리면 다시금 이해와 존중과 배려의 사회를 추구하거나 더 좋은 사회를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별이 존재해야 함에는 변함이 없으나 차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아닌 하나의 선택지를 언급했을 뿐으로 차별이 존재해야 한다는 화두에서 시작된 차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의 방향성은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차별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평등한 사회, 공평한 사회, 존중하는 사회, 복합적인 사회등 당신이 원하는 사회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방향성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