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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필 Jun 03. 2024

여사친 남사친

연인관계라는 줄다리기

이성 간의 친구관계 가능할까?

이성 간의 친구관계, 여사친남사친에 대한 논쟁은 '이성친구는 있다, 없다'와 '이성 간에 영원한 친구는 있다, 없다'로 나뉘는 흑백논리의 논쟁에서부터 합의점을 찾기 위한 '이성친구를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에 도달했다. 그렇게 합의점을 찾는 과정에서 '이성친구는 없다'측은 이성친구의 수용범위를 후하게 쳐줘도 단체로 모이는 자리, 비즈니스라면 어쩔 수 없으나 아무리 사람이 많은 공간이라도 둘이 만나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리고 이 수용범위의 근거로 이성친구가 있을 수는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 다수의 실제사례에서 영원한 친구가 없었던 것을 예시로 들고는 한다. 그렇다 보니 '이성친구는 있다'측에서는 친구가 이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귀지도 않을 거고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진짜 친구임에도 '이성친구는 없다'의 입장을 반박하기에는 영원히 살아본 적이 없어서 증명할 수 없기에 답답해지 십상이다. 결국 '이성친구는 없다'라는 정의로 인해 '이성친구는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이성친구가 자신을 좋아하지는 않을지, 자신이 이성친구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을지 의심해야 할 것만 같고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로 이성을 대하는 호감이 아닌 친구로서의 호감만을 느끼고 있는데도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우린 그냥 친구야!"라고 외치는 것이 오히려 가장 명확하고 진실돼 보인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애초에 수용범위를 정할 때 친구관계와 애인관계의 수용범위가 아닌 이성친구관계와 애인관계의 수용범위를 정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이성친구는 없다'라는 의미에서 시작하는 것에 가까워서 '이성친구는 없다'의 주장이 좀 더 근거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시작을 그렇게 잡아서 영원한, 완전한 이성친구가 없어 보일 뿐 사실 이성친구에 대한 논쟁의 본질은 성별이 아니다. 그리고 이 논쟁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동성애라는 상황을 가정해 성별이 문제가 아님을 알아보겠다.


동성애와 이성친구 

동성애 성향의 남자는 남자이면서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와 친구로 지내기도 한다. 이러한 동성애성향에 '이성친구는 없다'를 대입하게 되면 동성애인 남자는 남자를 좋아하기에 남자와 친구로 지낼 수 없고 여자랑만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성애인 여사친들의 연인은 남자이다 보니 여사친의 연인이 동성애인 남자일지라도 친구로 지내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성애인 남자는 남자와도 여자와도 친구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그렇게 이성 간에 친구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동성애 성향의 사람은 애인 이외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립되고 단절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동성애인 남자 중에 이성친구인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고 애인인 남자만을 사랑하고 다른 남자와는 친구로 지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에 동성애인 남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립되고 단절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빗대어 생각해 보면 같은 동성애 성향의 남자라도 사바사이기에 누군가는 남자인 친구 모두를 연인의 감정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모든 남자에게 연인의 감정으로 대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남자인 친구 중에 연인의 감정으로 대하는 일부가 나눠져 있는 등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바사의 예시에 이성애를 대입하면 누군가는 모든 이성친구에게 연인의 여지를 남기고 대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성친구를 친구의 감정으로만 대할 수가 있어서 각자의 기준에 따라 이성친구라 할지라도 연인으로써의 발전가능성이 있을 수 있거나, 없는 것으로 나눠진다. 고로 누군가에겐 이성친구가 존재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모든 이성을 연인의 감정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이성친구는 없다'에 해당하기에 연인인 이성을 제외하고는 이성친구를 만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맞고, 이성을 대할 때 친구를 대하는 감정과 연인을 대하는 감정이 확실하게 분별되는 사람이라면 '이성친구는 있다'에 해당하는 것도 맞다. 그래서 이성과 친구를 대하는 감정과 행동에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인이 허락했다는 가정하에 이성친구를 만나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이성을 연인의 감정으로 대하는지, 연인과 친구를 대하는 감정이 나눠져 있는지, 친구의 일부를 이성의 감정으로 대하는지 등은 사바사이기에 이성친구에 대한 논쟁의 요지는 성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성친구에 대한 논쟁의 요지는 무엇인가?

이성친구에 대한 논쟁의 요지가 성별이 아니라면 왜 성별을 우선으로 두고 논쟁을 해왔을까? 이는 연인관계에서 형성된 애착으로 인해 상대방의 이성친구가 '나'를 불행하게 하고 연인관계의 지속성에 불안감을 주는 주된 요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착을 이용해 상대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관계를 끝낼 것이라고 불안감을 불러일으켜 얻을 것만 얻어내고 실질적인 가치는 내어줄 듯 말 듯하면서 내어주지 않는 것을 반복하는 어장, 유사연애등의 실제사례가 빈번하기에 충분히 그렇게 여길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친구, 친분, 썸, 연인이라는 명분을 이용해서 악용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고서 상대방의 이성친구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뿐으로 상대방의 이성친구가 '나'에게 불행을 주는 것도 아니고 연인관계를 끝내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도 있을지언정 주된 요인은 아니다. 이는 친구, 친분, 썸, 연인이라는 명분을 이용해서 악용하는 사람은 이성친구가 아닌 동성친구를 포함한 모든 관계에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친구, 친분, 썸, 연인이라는 명분을 악용하는 사람은 이성친구 문제와는 별개이다. 그리하여 이성친구가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유형의 사람과 연인관계일 때는 그와 그의 이성친구를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범위를 연인관계가 아닌 모든 관계로 넓혀보면 관계의 지속성에서 이성친구 이전에 고려해야 할 것은 유대감, 친밀감, 안정감, 지속성, 확실성, 신뢰, 감정등이 있으며 이를 토대로 다시 연인관계를 생각해 보면 성별에 과몰입되어 있는 이성친구논쟁은 관계의 지속성에 불안감을 주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을 뿐 논쟁의 주된 요인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관계의 지속성에서 이성친구 이전에 고려해야 할 것을 검토해 보면 이성친구논쟁은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물음이며 논쟁의 요지는 연인관계에 대한 지속 가능한 안정감이 된다. 그렇다면 연인관계에 대한 지속 가능한 안정감이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에서 형성되는 안정감을 토대로 모든 관계에서 파생되는 안정감과 연인관계에서만 파생되는 안정감을 분별지음으로써 연인관계에서 지속 가능한 안정감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관계에서 형성되는 안정감

연인관계에서 형성되는 안정감을 애착과 연관 지으면 연인관계에 있어서 이성친구의 문제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유대감이 형성된 대상에게 '나랑만 친해야 돼', '나랑만 해야 돼', '나에게만 그래야 돼' 하는 인간관계의 문제와 유사하다. 이 유사성에서 파생된 지속적인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동일한 문제가 연인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나랑만 친해야 돼', '나랑만 해야 돼', '나에게만 그래야 돼'하는 것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 수용범위가 넓어서 정당한 반면에 모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나랑만 친해야 돼', '나랑만 해야 돼', '나에게만 그래야 돼'하는 것의 수용범위는 정당화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동일한 안정감을 얻고자 했음에도 관계성에 의해 정당화가 되기도 하고 정당하기도 한 것인지는 안정감을 얻기 위한 관계형성의 구조를 통해 알 수가 있다.


안정감을 얻기 위한 관계형성구조

안정감을 얻기 위한 모든 관계는 관계형성구조에 포함돼 있고 크게는 무리생활을 할 때부터 생존을 위해 형성된 관계형성구조와 언어의 개발 이후 극대화된 정서적 소통을 위한 관계형성구조로 나눠진다. 무리생활을 할 때의 인간은 무리생활을 하는 여타 다른 동물처럼 정서적 안정보다는 생존방식과 유대감이 매개체가 되어 다수의 관계형성을 했다면 언어의 개발 이후에는 문명과 함께 정서적 소통에서 오는 안정감이 매개체가 되어 다수의 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지금은 생존의 안정을 위해 관계가 필요한 사람과 정서적 안정을 위한 관계가 필요한 사람이 나눠졌으며 생존의 안정을 보장받기가 전보다 수월해진 지금은 생존만 가능하다면 인간관계없이 혼자 살아도 무방한 사람과 생존이 가능한 것과는 별개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교류가 필요한 사람으로도 다시 한번 나눠졌다고 본다. 이러한 관계형성구조에 연인관계를 대입하면 이성친구문제는 대개가 연인관계를 통해 '내'가 얻어야 할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안정감이 상대방의 이성친구로 인해 불안정해져서 발생하는 것으로 애착에 의해 불행을 느끼는 것에 해당한다. 결국 '이성친구는 없다'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이성친구로 인해 불안감과 불행을 얻게 되는 것은 맞으나 이 불안감과 불행의 원인을 비단 이성친구라고 보기보다는 연인관계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안정감과 행복에 불확실성이 개입한 모든 것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이성친구가 많지만 신뢰가 가는 사람, 이성친구가 없어도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 상대방에게 이성친구가 많아도 신뢰를 하는 사람, 상대방에게 이성친구가 없어도 신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나눠지고 상대방의 이성친구로 인해 '나'는 불안하지만 상대방은 믿는 것처럼 신뢰와 안정감 또한 별개이기에 '내'가 신뢰를 못하는 사람인건지, 상대방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람인건지, '내'가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인건지, 상대방이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인건지를 분별하기 위한 고민은 해봐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성친구의 유무와 안정감이 별개임에도 애착을 이용한 악용을 하지는 않더라도 친구, 친분이라는 명목하에 신뢰를 기반으로 이성친구를 애인 대체제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점은 주의를 해야 한다. 대체제라는 표현이 거부감이 들 수는 있으나 친구, 직장동료, 지인을 포함해서 이성을 볼 때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신뢰를 기반으로 연인관계형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순리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경우라면 애인이 있을 경우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애인에게만 집중하는 전제조건과 분별력이 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전제조건과 분별력만 있다면 대체제가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고 대체제는 영원히 친구로 남게 될 것이다.


이성친구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

일부일처제일 때는 배우자에게 형성되는 새로운 이성과의 인간관계로 인해 불안감이 따라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지만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일 경우에는 배우자에게 새로운 이성이 생겨도 일부일처제보다는 안정감이 확보될 수가 있으며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인 경우에도 배우자에게 새로운 이성이 생겼을 때 불안감을 따라오는 경우도 있기에 상대방에게 이성친구가 생겼을 때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는 것은 제도와는 상관없이 사바사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연인관계인 상대방에게 이성친구가 있을 때 불안감이 생기는 것, 불안감이 생기지 않는 것 중에 어느 하나가 당연하다고 정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연인관계인 상대방의 이성친구로 인해 불안감이 생기는 부분에는 이성친구와 불안감의 교집합이 존재할 수 있을 뿐 별개의 영역이라서 이성친구로 인해 불안감이 생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연인관계에서 안정감을 얻는 요소가 사람마다 다르기에 상황에 따라 불안감이 생기는 것을 뜻하며 사람마다 연인관계에서 형성되는 애착에서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안정감을 느끼는 요소가 무엇인지가 중요해진다.


이성친구 논쟁의 요지는 가치관의 소통

안정감을 얻기 위한 관계형성구조와 연인관계에서 형성되는 애착을 토대로 보면 연인관계는 마치 너무 쌔게 잡아당겨도, 놓아버려도 무너져내리는 안정감과 불안감, 행복과 불행을 오고 가는 줄다리기 같다. 그리고 연인관계라는 줄다리기는 누가 이기느냐의 대결이 아닌 연인관계라는 줄을 함께 들고 갈 수 있는지, 가고 싶은지의 경기가 된다. 이를 연인관계에서 오는 안정감과 행복의 관점으로 보면 줄을 같이 들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깻잎을 떼주고 새우를 까주고 이성친구가 있든 없든 간에 '나를 사랑했으면 하는 마음', '나만을 사랑했으면 하는 마음'등 대부분 정서적 안정과 행복에서 기인해 '특정 행동, 가치관을 수용할 수 있는지'에 도달한다. 결국 이성친구 논쟁이 흑백논리에서 수용범위로 옮겨간 것은 연인관계로 지내는 데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기준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기준의 최소조건에 성립하는가의 관점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에 해당해서 서로의 가치관의 최소조건이 성립하지 않고 조율도 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불안감과 불행이라는 줄을 부여잡고서 연인관계를 이어 나갈 것인지 아니면 줄을 쌔게 잡아당기거나 놓아서 무너져 내리든, 끊어버리든지 해서 연인관계로 지내지 않을 것인지의 선택에 놓인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고 연인관계를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성친구가 있어도 된다, 안된다'는 식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흑백논리의 대화보다는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안정감과 가치관을 이해하고 '나'도 상대방이 원하는 안정감과 가치관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가치관의 소통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가치관에 타협점이 없는 부분은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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