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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필 Jun 10. 2024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모순

섹스라는 불가항력, 윤리적 사랑의 딜레마, 돌고 도는 사랑의 정의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모순

사랑이 있는 섹스와 섹스가 있는 사랑 그리고 사랑이 없는 섹스, 섹스가 없는 사랑 중에 딱 잘라서 정답을 정할 수는 없으나 너무나도 쉽게 사랑과 섹스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사랑과 섹스를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마음을 통해 사랑과 섹스를 하나의 영역으로 융합하는 모순된 사랑의 구조가 대중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화되어 있는 사랑의 구조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아직까지 모든 사랑의 정의는 사랑에서 파생된 내용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나온 이론에 한해서 함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함구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에는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가 내려져 있고 지금까지 내려진 정의에 의해서 마음으로 융합된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주장 또한 피해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이 모순이라는 특이점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하나로 융합된 사랑과 섹스도 사랑이 포함된 섹스와 사랑이 포함되지 않은 섹스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 융합할 수도 있고 나눌 수도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만약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 융합하기를 선택했다면 사랑하는 부모나 자녀 그리고 형제자매와 섹스를 해야 하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과 섹스를 해야 하고, 종교가 있다면 함께 종교사랑을 논하는 종교인들과 섹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억지라고 느낀다면 가족이나 친구, 소속된 단체등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특정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데 합쳤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면서 왜 또 섹스가 포함 됐을 때와 아닐 때의 사랑이 분리되었으며, 왜 사랑과 섹스를 이야기할 때는 섹스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일반화되었는지는 명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섹스를 할 수 있는 대상과 할 수 없는 대상으로 분리되어 사랑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나눠서 대중화되었을 것이다. 결국 사랑과 섹스를 마음으로 융합했을 때 사랑자체는 명확하게 구분 지어지지 않는 반면 섹스라는 단어는 단어 안에서 뜻이 나눠지는 것일 뿐 나눠진 뜻은 명확하게 구분이 가능하다. 이 말인즉슨 사랑과 섹스를 분리할 때 애매한 것은 섹스가 아닌 사랑이라는 단어라는 거다. 그리고 이는 사랑과 섹스를 연결 짓지 않은 채로 봐도 대개가 윤리적 당위성을 토대로 사랑을 종류별로 나눴을 뿐이지 사랑이 윤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전제 또한 모순되어 있기에 사랑자체의 본질에 접근할 수가 없고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사랑자체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윤리를 기반으로 한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을 떠올려보면 연인 간의 사랑에서도 똑같이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분류가 될 것인데 이는 연인 간의 사랑하는 사이에서 섹스를 하는 것이 정당한 만큼 연인 간의 사랑하는 사이에서 섹스를 하지 않는 것도 정당해지기에 사랑하는 관계일 뿐인 연인 간에도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섹스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고로 사랑 없는 섹스와 섹스 없는 사랑을 하는 관계는 연인이 아니어도 되기에 윤리를 기반으로 한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은 윤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 모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사랑과 섹스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윤리적 사랑을 함구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 윤리적인 압박감이나 개인의 사명감에 의해 사랑과 섹스를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쳐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윤리적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섹스라는 불가항력

사랑과 섹스를 마음으로 융합한 시점에서 사랑이라는 애매한 단어와 섹스를 확실히 분리하려면 가타부타 나눠서 정의한 사랑들이 아닌 윤리적 사랑으로 섹스를 할 수 있는 연인 간의 사랑을 토대로 섹스를 생각해봐야 한다. 관점을 토대로 연인 간의 섹스, 속궁합이 맞으면 문제가 없으나 연애부터 결혼까지 섹스, 속궁합이 맞지 않는 상황은 성적취향은 고사하고 횟수, 빈도수, 성기능등으로 다양하며 사랑하는 연인과 속궁합이 맞지 않아서 헤어지고자 한다면 육체적 사랑, 정신적 사랑에 대한 개인차가 있음에도 사회의 의미부여가 육체적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존중하기에 헤어지는 것을 납득할 만큼 속궁합은 연인 간의 사랑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의 융합이 전제가 되어있기에 연인, 부부사이에서 섹스의 빈도수가 줄어들었을 때 사랑이 줄었다, 식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사랑과 섹스를 연관 짓는다. 


섹스가 줄어들어 헤어지려고 하는 시기가 연애단계라면 그나마 법적 절차 없이 헤어질 수 있으나 사실혼 이상의 단계일 경우에는 속궁합이 맞지 않는 것이 이유가 되면 법적절차를 거치고는 한다. 여기서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사랑의 종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예시로 들 수는 있으나 부부간의 사랑에는 대부분 섹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윤리적으로 보면 사랑과 섹스는 융합되어야 하는데 속궁합의 빈도수가 맞지 않아 이혼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강제로 섹스를 하면 성폭행이 되고 성욕을 이해한답시고 다른 사람이랑 섹스를 하게 두기에는 윤리적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 결국 다른 건 다 너무나 잘 맞고 진심으로 사랑하는데도 속궁합이 맞지 않아 이혼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속궁합이 맞지 않아서 이혼하는 것이라서 속궁합이 안 맞는다면 사회에서 말하는 섹스에 대한 윤리적인 부분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윤리적 사랑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섹스를 융합한 전제가 잘못되었기에 그 이후 일어나는 섹스 없는 사랑과 같은 일들은 윤리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섹스가 없는 것을 이혼사유로 삼을 수 있냐는 입장이라면 윤리적 사랑을 기반으로 식습관이 안 맞을 때는 따로 먹어서 해결할 수 있고 청소습관이 안 맞을 때는 하고자 하는 쪽에서 더 많이 해서 맞출 수가 있는 반면에 속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이랑 해결하라는 식으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 섹스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섹스를 원하고 있을 때 하지 않는다고 죽음에 이르지는 않기에 섹스를 원하는 배우자에게 '나'는 원하지 않으니 '내'가 원할 때까지 윤리적으로 참으라고 한다면 섹스를 원하는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잠이 부족한 사람에게 자지 말라고 하는 것, 굶주린 사람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것, 배변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배출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큼 섹스를 불가항력으로 여길 것이다. 이는 성욕을 참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성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욕구적으로 수면욕, 식욕, 배변욕만큼 힘들다는 것이고 성욕을 절제하는 것을 윤리적 사랑으로 보기에는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면 섹스를 원하는 만큼 사랑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꼴이 된다. 


윤리적 사랑의 딜레마

윤리적 사랑은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실현 불가능한 모순된 구조로 자리 잡고 있어서 윤리적 사랑이 이상적으로 완성되려면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모순을 성립시켜야 한다. 그래서 모순을 성립시키려고 해 보니 사랑은 혼자서 가능한 반면에 섹스는 혼자서 불가능하기에 모순을 성립시키려면 윤리적 사랑을 기반으로 사랑과 섹스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간의 만남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정말 그렇게만 되면 윤리적 사랑에 의해 바람, 외도문제에서는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섹스가 잘 맞는 것을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성 가치관, 성 취향등이 잘 맞아서 그런 것이지 윤리적 사랑 덕분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랑과 섹스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만 하면 생기지 않을 문제를 윤리적으로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 융합했기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윤리적 사랑이 대중화된 시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 섹스를 비윤리적으로 바라볼 수도 없기에 윤리적 사랑은 이리보고 저리 봐도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모순으로 인해 생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윤리적으로 봤을 때, 보지 않았을 때를 중점으로 보고 해결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무엇인지를 중점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논점을 흐리는 사랑과 섹스가 하나라는 모순과 윤리적 사랑에서 벗어나 사랑과 섹스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는 결코 윤리적 사랑을 제외함으로써 연인, 부부관계에서는 사랑만 추구하고 섹스만 하는 관계를 따로 분리하자는 등의 흑백논리식의 탁상공론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인 간의 사랑에서 사랑과 섹스의 관계가 밀접한 것은 맞으나 밀접하다고 해서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돌고 도는 사랑의 정의 

사랑의 종류와 유형은 다양한 방향성으로 정리가 잘되어있으나 각자가 느낀 사랑을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성으로 종류와 유형을 구분 지어 놓았을 뿐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랑자체가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으로 통하는 공통의 느낌은 있으나 규정지어지지는 않아서 각자가 어떠한 정의를 내리든 모두의 사랑을 다시금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의되어 있는 사랑이 아닌 사랑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점은 분명히 있으나 그 공통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원점으로 돌아오고 다시 고민하는 도돌이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삶, 인생의 정답을 찾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정답이 없는 삶, 인생에 모두의 정답은 없지만 스스로의 정답은 정할 수 있듯이 사랑의 종류도 스스로의 정답은 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로 사회가 정해놓은 사랑의 정의는 오늘의 정답이 내일은 정답이 아닐 수가 있어서 현재 정의되어 있는 사랑의 정의들은 공통으로 느끼는 미묘한 느낌을 제외하고서는 언제든 정답이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돌고 도는 사랑의 정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언제든 정답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고 '나'의 생각에 의해 사랑을 섹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랑이 섹스인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를 면밀히 알기 위해서는 사랑의 유형과 종류가 나눠지기 이전에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당신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사랑은 섹스와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섹스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섹스는 사랑과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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