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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필 Jun 17. 2024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의 본질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사랑, '너'가 생각하는 사랑,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말하기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의 대개가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나'의 사랑을 주장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사랑에서 파생된 정의들 또한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주장한 것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의문형 의미부여이기에 정확히 정의할 수가 없고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분리하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정의해 놓은 사랑만이 정답형 의미부여라고 주장하게 되고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된 사랑이 정답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해는 할지언정 그렇게 분리된 사랑의 정의들은 적재적소에 잘 활용되고는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각자가 정의한 사랑이 다름에도 사랑에서 느끼는 알 수 없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거다. 사람마다 사랑의 정의를 다르게 했음에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면 사랑에는 분명히 정답형 의미부여에 근접한 본질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 근접한 본질을 무시한 채 의문형 의미부여인 사랑을 정답이라고 정의하면 정답형 의미부여에 근접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면 정답이 아닐지언정 의문형 의미부여도, 정답형 의미부여도 아닌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을 알게 되더라도 사랑이 애초에 의문형 의미부여이기에 지금까지 이루어진 사랑의 정의들은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된다. 이를 고려해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의문형 의미부여인 사랑의 정의들을 간소화해서 재분리를 하고자 한다.


사랑의 재분리

사랑의 정의는 모두가 들어봤을 법한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기반으로 간소화해서 재분리하겠다. 그리고 재분리에서 유의할 점은 정신적 사랑, 유체적 사랑 중에서 따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랑이 다른 것뿐으로 언급하지 않은 더 다양한 사랑의 정의들 또한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뿐이라는 거다. 이는 사랑의 재분리는 정답을 정하려는 의도가 아닌 재분리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에 가까운지를 알고자 함을 의미한다.


정신적 플라토닉

정신적 플라토닉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정신적 사랑과 유사하며 육체적 사랑에 대립하기 위해서 순수함을 매개체로 삼는 것이 아닌 정신적 플라토닉의 고유성을 중점으로 삼는다. 여기서 뜻하는 고유성은 육체를 제외하고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사랑의 정체성을 의미하고 육체가 포함되지 않은 정신적 교감을 말한다. 이는 플라토닉 사랑이 정신적 교감을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 육체적 사랑을 경멸하거나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우선순위가 정신적 교감을 우선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적 플라토닉에서의 정신적 교감은 신체접촉이 없어도 돼서 예술, 물체, 자연 등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제한이 없다.


육체적 플라토닉

육체적 플라토닉은 육체가 서로 맞닿지 않아도 육체적으로 같은 경험을 하거나, 했던 동질감이나 성적관계에 해당하지 않는 스킨십등으로 정신적 교감을 매개체로 삼고 있다. 그래서 기존의 정신적 사랑이 육체가 제외된 순수한 사랑에 해당했다면 육체적 플라토닉은 정신적 교감을 매개체로 한 육체적 교감 또한 가능한 것으로 분류된다. 그렇기에 성적관계에 해당하지 않는 가족, 친구, 반려동물, 물체등 스킨십이 가능한 모든 관계가 육체적 플라토닉에 해당한다. 그리고 프리허그의 본래 목적인 포옹을 통해 안정감을 전달해 주고, 인류애를 나누고, 정신적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는 것이 육체적 플라토닉의 표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성적 사랑

성적 사랑은 충동적인 욕정이 아닌 성적인 이끌림에 해당하는 욕정으로 스킨십, 섹스등 육체적 관계 이전에 성적 이끌림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이끌림에는 정신적 플라토닉이 내포되어 있어서 정신적 플라토닉이 없는 욕정은 성적 사랑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적사랑과 육체적 플라토닉을 헷갈릴 수가 있는데 성적 사랑은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 육체적 플라토닉은 성적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내'가 하는 사랑이 성적사랑인지 육체적 플라토닉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교류가 있는 대상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도 되는지, 안되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필요하다. 인식능력이 부족하면 성적사랑과 육체적 플라토닉의 경계가 무너져 내려 성적 이끌림은 충동적인 욕정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 성욕해소만을 바라는 육체적 관계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성적사랑에서는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며 성적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관계일지라도 욕정이 있는 서로의 동의하에 성관계에 도달해야 한다.


성욕사랑

성욕사랑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육체적 사랑과 유사하고 육체적 관계를 매개체로 하며 성관계 자체를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성적 사랑과는 다르게 성욕에 의한 성적인 이끌림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하며 정신적 플라토닉이 내포되지 않은 사랑이다. 그리고 성적 사랑과 동일하게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한데 성욕사랑에서는 대상도 제대로 인식하고 서로의 동의하에 성관계를 나눴더라도 윤리적 사랑이 기준인 사회에서는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사랑을 나누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이 다르다. 결국 윤리적 사랑이 기준인 사회에서는 '내'가 성욕 사랑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이더라도 정신적 플라토닉을 동반하는 것이 좋다. 이는 서로가 육체적 관계를 사랑의 매개체로 삼고 성관계를 가졌어도 사회의 기준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가지 중 '내'가 선택한 사랑은 무엇인가?

앞서 분리된 4가지 사랑은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랑을 이 4가지로 정의하기 위함이 아닌 사람마다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지함으로써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에 가까운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4가지 사랑 중 일부는 대상에 따라 제한적이지만 이성과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을 중점으로 생각하기엔 적합할 것이다.


이성과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을 중점으로 '나'에게 4가지 사랑을 대입하면서 유의할 점은 4가지 사랑은 복합적이면서 유기적이기에 우선순위가 정해진다고 해서 1순위만 100%로 여기는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서 4순위의 사랑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성욕 사랑만 100%라고 단정 지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섹스'라는 거다. 이는 정신적 플라토닉이 내포되지 않은 상태로 성욕에 의해 섹스를 했더라도 섹스를 통해 육체적 플라토닉이 이루어져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냥 섹스'를 포함해 5가지 사랑으로 분리하지 않은 것은 성적인 이끌림이 아닌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그냥 섹스'는 섹스의 대상을 사람이 아닌 소모품인 도구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사랑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를 토대로 알 수 있는 것은 4가지 사랑은 복합적이면서 유기적이라서 같은 대상에 대한 사랑의 우선순위가 정신적 플라토닉에서 유체적 플라토닉으로, 성적 사랑으로, 성욕 사랑으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우선순위 또한 고정되지 않은 채로 변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이 타인과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가 잘못된 것이 아닌 각자가 선택한 사랑이 다른 것뿐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4가지 사랑 중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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