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보호자 시점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졌다. 밀리라는 꽃에 물들었나 보다.
생명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이어주는 문인 것 같다. 밀리를 만나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졌다. 밀리라는 꽃에 물들었나 보다.
반려견을 맞이하고 생긴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아마도 ‘관점’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전에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조용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좋다. 하지만 밀리와 산책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바닥을 보며 다니자니 보이지 않던 담배꽁초와 비닐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분리수거함 옆에 깨진 유리 조각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신발을 신은 성인인 나에게 안전하고 깨끗했던 산책길은 어린 강아지에게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다.
강형욱 훈련사님이 영상에서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보호자가 바닥에 실수로 떨어트린 핫도그를 강아지가 먹었어요. 강아지가 잘못한 걸까요?”
우리는 질문의 뉘앙스 덕분에 강아지가 잘못한 게 아니라 어쩌면 내 잘못이겠구나를 생각하게 된다. 뉘앙스 덕분에.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강아지를 강아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부족한 우리와 다르게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빠르게든 느리게든 학습하고 따라와 주는 강아지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럼에도 반려견들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오늘도 꼬리를 살랑여준다.
우리는 강아지가 삐지고 복수심에 불타올라 아무 데나 배변한다고 생각한다. 장난감을 물고 그르렁 거리는 모습을 보고 공격성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목욕과 빗질을 싫어한다고 불평한다. 심지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복종훈련을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나는 훈련사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밀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를 좋아하기만 했던 무지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겸허한 마음으로 내 욕심과 강아지를 위한 것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버둥거리는 초보 보호자일 뿐이다.
밀리가 가족이 되고 나서 우리 집은 조금 더 조용해졌다. 아이와 강아지 앞에서는 카톡으로 싸우라는 말이 있다. 큰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 자체가 줄어든 부분도 있지만 우리는 밀리에게 ‘말’을 걸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말’은 강아지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밀리야’ ‘이리 와’ ‘앉아’ ‘기다려’ 그리고 ‘안돼’는 한다. 그리고 졸졸 쫓아다니다가 실수로 밀리의 발을 밟는 날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미안해’를 연발하게 된다. 하지만 ‘산책 갈까?’ ‘오구오구’ ‘그랬쪄요’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리드 줄과 하네스를 꺼내고 조용히 옆에 앉아있어 준다.
훈련사 분들의 영상을 수없이 찾아보다 보니 공통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다양한 조언을 해주지만 보호자에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항상 이 말이 등장한다.
“보호자님, 강아지는 사람 나이로 하면__살이에요.”
아, 이렇게 말해야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큼 사람은 참 자기중심적이구나. 사람은 사람인지라 강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강아지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차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닮았지만 다른 남편을 보며 하게 되었다.
온전한 이해는 욕심이다. 하지만 배려와 존중은 선택이다. 강아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강아지가 강아지로서 누려야 하는 마땅한 행복을 보장해주는 게 보호자의 역할이 아닐까. 전지적 강아지 시점은 불가능할지라도 전지적 보호자 시점은 갖고 싶다.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