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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보 Nov 24. 2020

예보 일기_04

이름의 중요성

감자 칼: 감자의 껍질을 쉽게 벗길 수 있도록 고안된 칼. 칼날 가운데 길쭉하게 홈이 나 있어 감자의 표면에 이 칼을 대고 위에서 아래로 밀면 홈을 통해 껍질이 벗겨진다. 당근, 오이 등 다른 야채의 껍질을 깎을 수도 있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 안에는 그 무언가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기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잘못된 이름이 오히려 그 대상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국그릇’에는 왠지 국만 담아야 할 것 같고, ‘커피잔’에 홍차라도 마시는 날에는 잔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만 같다. 반대로 이름은 거창한데 현실이 그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직접 들여다보면 그 누구도 고급 호텔에 있는 ‘직원 휴게실’이 제대로 된 ‘휴식’ 공간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 ‘화장실’에 ‘화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건 그리고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가장 좋은 이름은 본질과 기대 그리고 현실 사이에 어느 정도 균형이 유지되고, 동시에 이름의 의미를 각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개인차를 배려하여 듣는 이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자칼’은 가능한 한 빨리 이름을 바꿔야 한다.


나는 과일을 딱히 못 깎지 않는다. 원하면 얼마든지 과도로 얇고 예쁘게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리로 자를 수 있다. 엄마가 여자는 과일을 잘 깎아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과일을 과도로 깎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훨씬 더 안전하고 편리한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과나 배를 감자칼로 깎아본 적이 있는가? 이보다 더 얇고 안전하게 깎는 방법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엄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신혼집에 놀러 오신 엄마는 주방에서 감자칼로 신속하게 배를 깎고 있는 나를 보고 ‘어이구’를 연발하셨다. 아랑곳하지 않고 ‘감자칼’을 애용해온 나였기에 기분이 상하거나 상처 받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답답함이 맴돌았다. 대체 누가 과일은 위험하게 칼로 깎아야 하는 거라고 정해 놓은 걸까?


사람 가운데 살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결국 가족 또는 가족과 같은 어느 타인이 나에게 선물한 ‘바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은 나의 것이다. 그 기대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 반항하며 반대로 살지,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담겼으면 하는 의미를 만들어 가면서 살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누가 감자 칼은 감자 깎는데만 사용해야 한다고 정해 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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