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전히 ‘느린 이야기’에 끌릴까
얼마 전, 크런치롤 역대 애니메이션 순위를 보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1위를 지켜오던 원피스가 2위로 내려앉고, 그 자리를 나 혼자만 레벨업이 대신한 것이다. 한국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이 글로벌 팬들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라웠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어쩐지 나는 조금 낯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먼치킨물’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강력한 주인공이 일사천리로 적을 쓰러뜨리는 시원한 전개. 처음엔 짜릿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개는 단조로워진다. 실패도, 고뇌도, 갈등도 없다면 감정이 깊어질 여지도 없다. 나는 그보다는 좌절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서히 성장하는 이야기 속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사이다 전개’가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고구마처럼 답답하니까.
부조리한 사회, 취업난, 갑질, 열정페이에 지친 사람들이 허구 속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모든 것을 통쾌하게 해결해 주길 바라는 마음.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최근 유튜브에서 “요즘 사람들이 강철의 연금술사를 보지 않는 이유”를 다룬 영상을 보게 됐다.
내게는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에, 그 제목만으로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영상 속 설명은 이랬다.
주인공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서사가 길다.
눈에 띄는 캐릭터가 부족하다.
말하자면, 자극이 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매력이 오히려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능력을 지녔고, 과정은 길지만 치밀하며,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서사가 있다.
엘릭 형제는 물론이고, 윈리, 머스탱 대령, 호크아이 중위… 각자의 고뇌와 신념을 지닌 이들이 이야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단지, ‘트럭에 치여 이 세계로 간’ 이야기도,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전개도 아니라서 지금의 속도감 있는 콘텐츠들과는 결이 다를 뿐이다.
비슷한 이유로 장송의 프리렌도 외면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작품들에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정통 판타지의 잔잔한 울림, 세계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 질리고 닳아버린 이세계물 사이에서 오히려 새로움을 느낀다.
물론 모든 창작물은 취향의 영역이다.
장르, 그림체, 연출, 성우, 분위기… 어떤 요소에 마음이 끌리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나는 ‘이 세계’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은 의식적으로 멀리하게 됐다.
너무 많고,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대개 세계관 최강자이며, 주변 인물들은 모에 요소를 갖춘 데다, 반전이라고 해봐야 대개 예측 가능하다.
비슷한 전개, 비슷한 대사, 비슷한 결말.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감정의 결은 점점 옅어져 간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시대에 뒤처진 걸까?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들 속에서, 여전히 기승전결과 감정선에 집중하고 싶은 내가 낡은 걸까?
어릴 적 내가 접했던 콘텐츠들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음악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하나의 이야기를 완결 짓는 데 집중했다.
느리고 정직했으며, 여백이 있었다.
어렸을 적, 가족 여행을 갈 때면 부모님은 늘 자신들이 20대 시절 듣던 노래를 틀곤 했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똑같이, 10대·20대에 듣던 노래를 반복 재생하고 있다.
그 시절의 감정과 기억이, 음악과 함께 되살아나기 때문일까.
90년대의 한국 가요는 지금의 아이돌 음악과는 결이 다르다.
서두르지 않고 분위기를 잡는 전주, 철학이 담긴 가사, 기억에 오래 남는 멜로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 음악들이었다.
요즘 아이돌 음악은 대체로 짧다. 인트로가 거의 없고, 3분을 넘기지 않는다.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는 평이하고,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모든 곡이 그런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작사·작곡에 직접 참여하며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자) 아이들 같은 그룹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도파민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신경전달물질이다.
운동을 조절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의욕을 만든다. 그러나 모든 도파민이 좋은 건 아니다.
눈앞의 자극만을 좇는 방식은, 오히려 뇌를 쉽게 피로하게 만든다. 유튜브 쇼츠, SNS 좋아요, 단톡방의 피상적인 대화들. 그 익숙한 자극이 뇌를 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나는 종종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공원 산책을 즐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자극적인 도파민 대신, 차분하고 건강한 도파민을 만들어주는 작은 습관이다. 자극적인 웹소설 대신, 나는 고전을 곁에 둔다. 데미안, 오만과 편견, 햄릿 같은 작품들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조용히 건넨다.
그런 이야기들은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깊이에서 잊고 지낸 감정들을 다시 만난다.
#도파민사회 #느림의미학 #창작의본질 #요즘사람들 #취향의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