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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이름의 감옥에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by Dㅠ

인간이라면 누구나 엄마의 뱃속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세상으로 깨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울음으로 욕구를 표현하고, 부모는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아이를 품에 안는다. 그렇게 보살핌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자아를 깨닫고, 단단한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다.

학교라는 제도 아래, 교과서를 넘기며 '사회성'과 '성숙'을 배우려 애쓴다. 중간고사 문제를 틀리고 머리를 싸매던 시절,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군대에서는 사회생활을 예행 연습했고, 전역 후 아르바이트를 통해 노동의 가치를 실감했다. 데면데면했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소통의 즐거움'을 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사회인으로 진출할 시간.
첫 면접에서의 떨림, 합격 통보를 받고 눈물 흘리던 그 순간의 벅참. 그러나 업무는 곧 반복되고, 나라는 인간은 어느덧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 있었다. 압박감에 시달리며 육체와 정신이 지쳐갔다. 안구건조증, 헤르페스, 불면증. 몸이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지금의 나는 묻는다.
이 피로한 육체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잘못된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평범한 인간일 뿐인가.

나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처럼 살 수 없을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매일같이 자연을 마주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이 구조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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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며 깨달은 것은 개인은 타인과 결속되어 있는 이상, 실질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감정을 공유하고, 대화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타인과 대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에너지가 든다. 특히, 내가 말한 것이 곡해되어 나에게 손해로 돌아올 수 있다면, 사람은 자연스레 감정을 숨기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해진 사회 구조 속에서 정해진 선택지만 반복하며 살아간다. 청소년일 땐 학교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가고, 성인이 되면 회사 시스템에 맞춰 챗바퀴를 굴린다. 그렇게 시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톱니바퀴의 삶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피로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2.jpg https://www.lifein.news/news/articleView.html?idxno=11181


내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인간에게 사회적/정치적 자유가 주어진다면 인간은 해방되는가?

둘째, 해방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어떤 행동이라도 해도 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YES’다.

사회는 개인에게 끊임없는 요구를 한다.
회사는 업무라는 이름으로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국가는 출산율 저하를 이유로 결혼과 아이를 강요하며, 가족은 ‘언제까지 캥거루족이냐’며 독립을 재촉한다.

그러나 인간은 각기 다른 기질과 개성을 가진 존재다.
누군가는 결혼이 맞지 않고, 누군가는 도심의 삶이 맞지 않으며, 누군가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을 원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맞는 삶’을 선택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라는 구조는 개인을 돈의 노예로 만든다. 집, 차, 명품, 외형적 성공에 집착하게 하며, 사람들은 삶의 의미보다는 생존과 과시에 집중하게 된다. 어느새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빚’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집을 사지 않았다면, 지금 이 회사에서 고통스럽게 일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시에서의 삶은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다.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산속에서 스님처럼 수양과 해탈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초록잎 나무를 보며 눈을 건강하게 하고, 시간과 돈에 쫓기지 않으며 동네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그런 여유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꺼리는 세 가지 주제가 있다.
성별, 종교, 정치.

한때는 웃으며 넘기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공격하는 소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 세 가지에 대해 평화주의자의 자세를 취한다.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넘긴다.

다행히 SNS가 잘 발달된 지금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의견의 아지트’를 만들어 살아갈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나누며,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공간. 나는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생각의 해방촌’이라고 생각한다.


t7ee-3RaWrkNDCZpOvKKobor4QZX2wVX.jpg 자유론의 저서자, 존 스튜어트 밀


2. 해방은 곧 자유인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인간은 어떤 행동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그의 말은, 자유의 조건을 간단히 요약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A라는 행동이 괜찮다고 여기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이 큰 피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할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

자유는 무질서가 아니다. 자유는 배려 위에 서야 한다. 사회는 나 하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제외하고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반대 의견을 억누르는 것은 옳지 않다.” → 소수의 목소리도 진리 발전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향으로 뿌리를 뻗는 나무 같은 존재다.” → 개성을 억누르는 사회는 결국, 창의성을 죽이고, 삶의 다양성을 말살한다.


사회는 평균적인 인간을 원한다.
"독립해야지", "결혼해야지", "집 사야지", "아이 낳아야지"
이 수많은 ‘당연함’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수록 반항심이 샘솟는다.
인간은 개성을 기반으로 성장해야 한다. 각자 자신의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나무처럼.
그것이 소수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다수를 위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다.
언제나 불안하고, 때때로 흔들린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자유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배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배움의 끝에는 자본주의의 사슬을 끊고 해방된 나를 발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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