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도 TV가 있었지만 옛날 고물 TV였다. 가끔씩 숙제 끝내고 밤에 TV가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었다. 각 채널마다 안테나 수신율을 맞춰야 하는 고철 덩어리. 안테나 수신율이 너무 안 좋아서 여러 번 휘릭 휘릭. 어찌어찌해서 안테나를 맞춰놨는데, 하필이면 비 오는 날이나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여김 없이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 화면만이 나를 울상 짓게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 주말에 대청소를 하다가 창고에 뭉툭한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이게 뭘까 호기심이 생겼다.
창고 구석에 처박혀 먼지 쌓여 있던 플레이어를 휴지로 닦아 내고 내 방으로 가져왔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만지작하다가 라디오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AM과 FM으로 나눠져 있었고, 둥그런 버튼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리니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신기했다. 대청소를 끝내고 플레이어를 만질 당시 밤 10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가장 처음 들었던 라디오가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그 날은 DJ가 편지 사연을 읽고, 위로와 격려를 표하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사연과 함께 사연자가 신청한 노래가 나오고, 광고가 흘러나온다. TV와는 다르게 화면이 없고, 소리만 있는데 즐거움을 느낀 나. DJ와 게스트의 말소리만으로 즐기는 그 웃음과 흥얼거림이 좋았다. 거기에 신나는 노래까지. TV를 대체할 좋은 대중매체를 찾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별밤이 끝나고, 밤 12시부터는 "박경림의 심심타파"라는 프로그램이 했었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2시부터는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왔는데, 굉장히 특이하게 아빠와 크레파스 동요가 선곡으로 나와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밤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일상을 보냈다. 2년 듣다가 내 방에는 컴퓨터가 생기면서TV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라디오와 멀어졌다.
최근 철야근무를 시작하게 되어 밤 8시 30분부터 다음날 아침 8시 30분까지 잠도 못 자고, 주야장천 일만 하고 있다. 밤에는 과장님이나 공장장님이 없기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편안하게 노래를 들으면서 나름 잠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 월요일에 최애 플레이 리스트만 켜놓고 일 하다가 뭔가 심심한 느낌이 들어서 뭐 색다른 거 없을까 하다가 퇴근한 후, 화요일 출근하여 옛날에 들었던 라디오가 문득 떠올라서 라디오 어플을 설치하고 듣게 되었다.
현재 별밤지기는 작사가 김이나로 바뀌어 있었으며, 심심타파 대신 "서인의 심야다방", 고스트네이션 대신 "아이돌 스테이션"이 진행하고 있었다. 라디오도 TV처럼 봄 개편, 여름 개편으로 인해 방송 자체가 아예 사라지거나 DJ가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옛날의 그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도 라디오의 본질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편지 대신 문자 및 어플을 통해서 청취자들이 사연을 올리고, 일일 코너는 바뀌었지만 채택되면 선물 받는 건 동일하며, 귀가 즐거워지는 신청곡도 들을 수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보이는 라디오가 가능하여 생방송인 프로그램은 DJ와 게스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DJ들이 청취자들의 사연 읽어주고, 인간 냄새가 나는 사연을 들으면 뭔가 나도 이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과 힘들겠다 라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나도 문자 보내면 읽어줄까? 기대감과 신청곡에 나도 한번 별밤에 문자를 보내기도 했었다. 라디오는 옛날 대중매체라 생각했고, 내가 문자 보내면 DJ가 읽어주지 않을까 라는 상상. 하지만 흔히 말하는 콘크리트층이 많은지 내 문자가 채택되지 않는 것은 아쉬웠다. 실제로 라디오는 자동차에 지금도 기본적으로 달려 있는 옵션이라 많이 듣고, 10대였던 청소년들이 나처럼 어른이 돼서도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남아 있어서 사연 및 신청곡에 뽑히는 것은 어렵겠구나 싶었다. 요즘 같은 빈부격차 극대화, 혐오와 갈등의 시대 속에서 거진 유일하게 청정구역이고,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줄어든 대 스마트폰, 유튜브 시대에서 몇 안 남은 사람 냄새가 남아 있는 대중매체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주일을 별밤, 심야다방, 아이돌 스테이션과 함께 하는 좋은 일주일을 보냈다. 다음 주도 철야근무를 해야 하는 게 매우 기분은 안 좋지만 라디오를 들으면서 힐링의 시간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