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주제: 술
매 주 친구 두 명과 함께 글을 씁니다.
-C-
<우리 얘기 쫌 해>
‘아니 우리 애기 쫌 해. 이리로 좀 앉아봐’
직장동료 M과 만담을 시작하기 전 단골 멘트다. 내가 새로운 지역,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부서 내에서)을 준 M은 어떤 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정말 쿵작이 잘 맞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내 고지식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의 일상을 되짚어보면, 아침에 전 부서를 돌며 인사를 드릴 때, 유독 서로에게는 유쾌하게 인사를 던진다. 상사의 눈치를 많이 보는 M은, 옆자리의 과장과 뒷자리의 부장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지나가는 나를 붙잡는다.
‘아니 우리 얘기 쫌 해, 잠깐 앉아봐.’
그러면 나는 즐거울 생각에 들썩들썩 거리며 M의 자리 옆으로 간다. 하도 들썩거려서 내 별명이 춉춉이가 됐을 정도다.(들썩거리며 걸어갈 때마다 내 운동화에서 춉춉 소리가 나서)
‘저 진짜 술 끊기로 했어요. 맹세합니다, 앞으로 한 달간 금주.’
‘헐, 그러면 오늘 찐막?’
‘아니 오늘부터 술 끊는다니까요?’
‘처음부터 알코올이 몸에 안 들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오늘 딱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끝낼까요?’
‘그건 또 그래? 그러면 정말 진짜로, 오늘 마지막으로 한잔 할까요?’
그렇게 실컷 얘기하고, 그다음 주에 다시 같은 멘트를 반복하며 소주 한잔 기울일 거면서, 마치 진지한 인생의 다짐을 하는 것 마냥 의기투합을 하며 저녁에 한 잔 할 것을 약속한다.
이전의 나는 전혀 몰랐지만, 이런 작은 대화들, 작은 웃음들이 생각보다 내 회사생활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M을 통해 많이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거라 생각하고 사소한 거라고 생각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어쩌면, 앞으로 사람들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찾은 건 아닐까 가끔 생각에 잠기곤 한다.
-J-
<돌아온 J>
언젠가부터 다시 책을 많이 읽게 된 J에게,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
어느 때보다 책을 많이 읽고 있지만, 도무지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J와 P는 그때 그 우동집에 앉아 지나간 시간들을 세어보고 있다.
글방을 멈춘 지 2년, P가 바다 가까이로 이사간지 1년
매주 월요일에 만나 떡볶이를 먹으며 의지를 다지던 시절이 아득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말랑해지려던
바로 그 순간,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인 듯 J의 마음속이 타올랐다.
'다시 글을 써보는 거야!! 우리 같이!!'
'일단 주제를 먼저 정해야 해!'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P의 뒤로 음료 냉장고가 보였고, 하늘색 병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술을 주제로 해서 숙취를 겪었던 일을 쓰는 거야!' 하고
마음이 벅차오른 J는
마음속의 생각들은 생략한 채
"우리 글방을 다시 시작하자! 첫 주 주제는 술이야!"라고 소리치게 된다.
그 뒤로 최종 목적지인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J는 무려 두 달 치, 그러니까 8개의 주제를 쏟아내게 된다.
4년 만에 방문한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곳에서
2시간의 예약 시간 중 1시간은 독서에 몰두했으며
남은 1시간과 다음 예약자가 오기까지 추가되었던 30여분 동안은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J와 P가서울에서 만나 책을 읽고 서점을 간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J도 P도이제는 월요일에 짜장 떡볶이를 먹으러 다닐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망원동 초록 램프 앞에서 책을 앞에 둔 그 순간
4년 전이 아니라 마치 어제 연희동에서 만난 것 같았고
지난주에 만나 우동을 먹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시킨 술은 그 남자네집에서 이름을 따온 술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녹은 맛이었다.
그 순간, 아 이거 참 맛있다,
다음에 또 오게 되면 이걸 마셔야지 하고 생각했고
지금 이 순간을 이번주의 글로 써야겠다,라고 다짐했다.
-P-
<여름 한정 음료수>
날씨가 더워지면 자연스레 시원한 것들이 생각나고 그럼 또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면 맥주가 먹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쉽게 들락날락하는 편의점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코너는 당연히 술을 파는 곳이다. 언제부터인지 맥주 네 캔에 만원이 당연하듯 큼지막하게 적혀있어서 왠지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럼 당연히 또 산다.
나에게 바이블 같은 맥주는 카스와 클라우드다. 거의 저 두 종류만 먹다가 매일 같은 것만 먹으면 좀 심심하니 가끔씩 새로운 맥주도 한 캔씩 집어온다. 바이블과 비슷한 맛이 나는 맥주면 합격! 맛이 너무 튀면 불합격! 을 외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최근에 불합격을 받은 맥주는 바로 1664 블랑. 가끔씩 맛을 잊고 그래, 다시 도전해보지만 역시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 캔 디자인은 참 고급지고 깔끔한데 맛있는지 잘 모르겠다.
결국 돌도 돌아 가장 익숙한 맥주를 꺼내먹는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그 빈도수가 눈에 띄게 잦아진다. 더워서 생각나고, 더우니까 과한 음식보다 간편한 메뉴를 생각하고 그러면 또 맥주가 생각나고. 계속 이유를 찾고 싶어 진다. 크게 취하지도 않아서 좋고, 맥주 캔을 딱! 따는 소리에 이미 기분이 좋고, 바람이 들어오는 테라스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입을 마시는 순간 내 기분에도 바람이 들어온다. 역시 이 계절엔 맥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