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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2 그쪽이 왜 거기서 말을 거세요?

by 눈새미

피하고 싶은 순간은 늘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속으로 ‘지금만 아니었으면’ 하는 그 타이밍에, 꼭 누군가는 말을 걸고, 그 말은 또 다음을 만들어 버린다. 뭐든 시작은 그런 식으로 오는 건가 보다.


3월의 그날도 그랬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 덕분인지 기분도 괜히 괜찮고, 문제도 막힘 없이 풀리고, 오답 정리도 놀라울 만큼 매끄러웠다. 마치 테트리스 왕중왕까지 클리어한 것처럼 뭐든 되는 날 같았다. 그리고 낯설기만 했던 학원은 어느새 집처럼 편해졌다. 이것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본능이었겠지만.

아무튼 그날을 되돌아보면 나의 행동은 아주 낯설게도 자연스러웠다. 문제집을 다 푼 것도, 파워 귀차니즘인 내가 새 책을 사기 위해 바로 로비로 내려간 것도, 어쩌면 흐름의 일부였는지 모른다. 평소 같으면 한 번쯤 멈칫했을 상황들이 매끄럽고 유기적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로비에서 나오던 P(지금의 남편을 P로 지칭)를 또 우연히 마주쳤다. 이번엔 피할 틈도 없이 P가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으앗!)



-안녕하세요. 대전에서 학원 다니셨던 분 맞죠?

-네! 맞아요 (... 근데 왜 나에게 인사를? 그나저나 이 사람 웃는 건 처음 보는데?)

-그때 자습실 앞에서 보고 긴가민가 했는데 맞네요.

-아, 하하. 저도 본 거 같아요.(본 거 같아요가 아니라 그쪽을 보고 매우 놀랐단다. 물론 지금도..)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네요. 반가워요. 악수라도 할까요?

-아 네!



왜 갑자기 악수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내 손은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뒤로 모든 게 휘몰아쳤다. 눈 마주침 -> 인사 -> 악수 -> 통성명 -> 번호교환 이 모든 게 매우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물 흐르듯? 아니, 거의 급류였다. 중간에 잠깐만, 스톱! 이런 기능이라도 있으면 좋았으련만, 실제 상황에서는 그런 판타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누가 진행 버튼 누르니까 행동하는 캐릭터처럼 움직였다. 심지어 그 와중에 번호까지 교환해 버렸다니. ‘이거... 나 지금 번호 따인 건가?‘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번호를 묻는다는 건 꽤나 분명한 호감의 표현인데, 난 언제나 그게 내 일이 되면 의아하고 어색했다. ‘왜? 나에게 번호를?‘

아니면 혹시 내가 누군가의 오작교 역할이라도 되는 건가?

"혹시 걔랑 친해요?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같은, 그런 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또 나름 납득이 가는 전개인데. 아무튼 저장하면서도 생각했다.


‘잠깐만… 내가 지금 이 사람 번호를 왜 저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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