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는 덤입니다.
미국에 2011년에 유학으로 오면서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다. 그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이사였으면‘하고 바라면서도, 반복되는 이사 덕분에 짐싸고 정리하는 것에는 자신이 생겼다. 덕분에 꼭 필요한 가구와 물건만으로 사는 심플한 삶이 자연스럽게 체득되었달까. 누가 준 가구나 자잘한 살림도 ‘오히려 좋아. 부담없이 쓰다가 집 살 때 사면되지 뭐‘ 하며 잘 써왔다.
결혼할 때 혼수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혼자 살 때에 쓰던 물건을 옮겨와 둘이 같이 살게된 것이라 사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집을 사고 이사를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눌러왔던 욕망(?)같은 게 꿈틀했다. “이 집에 오래 살 거니까 이제는 좀 무겁고 견고하고 예쁜 가구를 사도 되지 않나” 오래 살 집이라면 처음부터 예쁘고 깔끔하게 셋업해놓고 싶었다.
남편은 평소에 미감이 좋은 편이지만 이사를 준비할 때에는 극강의(!) 짠돌이 모드가 되었다. (남편은 반품이 안되는데 어쩌죠) 남편에게는 이번이 첫집 구매가 아니어서 그런지, “집 꾸미기 로망” 같은 건 1도 없었다.
남편: 남의 시선보다 우리가 괜찮으면 됐지.
그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는데 내 입은 이미 댓발쯤 나왔다.
나:힝. 그래도 나랑은 첫 집이잖아.
내가 과소비하자는 게 아니라, 오래두고 아껴 쓸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하자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가구를 하나씩만 산다면 뭘 사고 싶은지’ 고르기로 했다.
나는 식탁. 남편은 침대.
적어도 이 두 개는 서로 마음에 드는 걸로 사기로 했다. 조금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집에는 예전에 무료로 얻은 2인용 원형 테이블을 사용해왔다. 친구가 살던 아파트에서 나눔한다는 글을 보고 (suv도 아닌) 내 차에 거의 꾸겨 넣어(!) 가져왔던 식탁이다. 고양이와 살던 중년 남성분이 쓰던 식탁이었는데, 의자 천이 고양이 발톱에 조금 닳은 것 말고는 완벽했다. 단단한 원목 상판. 파란색 천으로 포인트가 있는 의자 두개. 작지만 애정을 담아서 사용했다. 손님 초대는 4명이 맥스였지만 오히려 아담한 사이즈 덕분에 꽉 차보이는 상차림이 되어서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새 집에 이 식탁이 너무 작았다. 그래서 얼마전 막 미국에 입국한 한국 분께 무료로 나눔했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식탁은 확장 가능한 원목 식탁이었다. 연애할 때에도 ‘집에서 좋아하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늘 식탁을 꼽았다. 널직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고, 차 마시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시간. 그 시간이 좋아서였다.
머리 속에 저장해둔 식탁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광택없는 원목, 부드럽게 마감된 둥근 모서리, 주방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디자인. Castlery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다이닝 테이블이 내 위시리스트였다. 의자를 빼고 다이닝 테이블만 해도 가격이 $1000불 정도여서 큰 투자라고 생각했는데…그럴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남편이 식탁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크래치부터 새로 만든 건 아니고, Craigslist에서 무료로 얻은 식탁을 리폼했다. 어느 여름날, 남표니가 suv를 가지고 “픽업할 게 있다“며 나섰다. 타주로 이사가는 사람이 무료로 내놓은 식탁이라며, 그걸 조심스레 분해해서 야무지게 챙겨왔다. 아직도 그 날의 온도, 습도가 생생하다. 이미 어둑어둑해져서 그 집 앞마당에서 자동차 라이트 불빛을 조명삼아서 분해했다. (가격은 무료였지만 모기에게 피를 많이 헌납했다.)
남표니는 “원하는 식탁으로 직접 만들어주겠다”며 몇 날 며칠을 한여름 땡볕에 사포질과 씨름했다. 전동 샌더가 약해서 결국 손으로 다 사포질을 하면서 땀을 얼마나 흘렀던지 모른다. 자꾸만 마음에 드는지 와서 보라고 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괜찮다는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식탁을 조립했다.
나: 잘했네- (어라?) 근데 식탁은 내가 고르기로 하지 않았어요?
남편: 응- 그랬어요. 한번 보고 마음에 안들면 버리고 원하는 거 사도 돼요.
나: 아니, 이렇게 고생해서 만든 걸 어떻게 버려!!!
남편은 ‘계획대로 되고 있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그렇게 남편의 피땀눈물로 완성된 식탁은 다이닝룸에 자리를 잡았다. 흔하지 않고 나무결과 손의 수고가 그대로 남은, 말그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식탁이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식탁과는 조금 다르지만 남편의 땀과 정성이 필터를 씌운것 같다. 좀 짠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어쨌든 확장형은 확장형이고, 원목이고 나름 주방 벽과도 잘 어울린다. (아직 신혼이라 가능한 필터일지도 모른다)
식탁 의자만큼은 남편이 한 뼘쯤 양보해주었다. 처음엔 “이것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라며 DIY를 시도하려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서 세일 상품 중에서 의자 하나당 $200에 찾아보기로 했다. 마음에 쏙 드는 의자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여러 가구점을 열심히 뒤져보다가 폐점 세일 중이던 At Home이라는 가구 매장에서 대대적인 세일을 한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의자는 직접 앉아보고 사야된다“는 남편의 신념을 따라 매장에 남아있 의자를 하나씩 앉아보며 몇 주만에 결국 둘 다 마음에 드는 의자를 찾았다. 50% 세일 중이어서 개당 $100. 가격도 착하다. 이것도 가구점에는 2개만 남아서 일단 2개를 사고, 나머지는 집들이를 앞두고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나중에 식탁밑에 나무를 덧대어 높이를 조금 높여 의자가 쏙 들어가게했다. 한쪽 코너에는 2021년부터 키운 몬스테라를 두고 마무리했다. 다이닝 공간이 제법 근사해졌다.
침대는 싱글일 때 쓰던 것을 Full size 침대를 (당연히) 그대로 가져왔다. 예전에 룸메이트가 준 침대였는데, 1인용 Full size침대라 나눔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게스트룸에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챙겨왔다. 이사하고도 한 달 정도는 이 침대에서 둘이 (떨어질까봐) 꼭 붙어서 잤다. (안방 놔두고 이게 맞냐며)
다행히 남편의 고모님이 이사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하셔서 코스트코에서 매트리스를 구입했다. 압축백에 말린 매트리스가 상자에 포장되어 있어서 둘이서 옮기기에 적당했다. 프레임은 Craigslist 무료템. 프레임 높이가 낮고 헤드보드가 없어서 좀 투박해보였는데 매트리스를 올리니까 의외로 높이가 적당했다.
결국 결혼하고 이사하면서 새로 산 가구는- 식탁 의자와 매트리스, 단 두가지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두개씩 사자”고 할껄 그랬다) 짠내나는 인테리어를 한 덕분에 반짝이는 새 가구는 없더라도 두고두고 얘기할 에피소드가 가득이다. 손님이 오면 “이 식탁은 남편이 직접 다 손으로 샌딩해서 만든거예요”,라며 단골 에피소드로 꺼내기도 하고 “의자 예쁘다”는 말에는 발품팔았던 썰을 풀게된다.
식탁과 침대 뿐만 아니라 다른 가구들도 에피소드를 하나씩 주렁주렁 달고 우리집으로 왔다. “소파는 저희 이사하는 날에 이웃 집에 들러서 무료로 가지고 온거예요. 계단 있는 2층에 소파가 있었어서 이웃이 이사 전에 내놓은 거라더라고요. 우리 둘이 끙끙거리면서 옮겼왔잖아요.“ 이건 소파의 에피소드이다. 그렇게 옮겨온 소파는 스팀 청소기로 몇 번 청소하고 얼룩을 지워내고나니 꽤나 멀끔하게 되었다.
소파 옆에는 남편이 결혼 전부터 쓰던 2칸짜리(검은색이었던) ikea서랍장을 두었다. 보드게임, 인터넷 라우터같이 가려두고 싶은 자잘한 물건을 넣고 벽에 붙여 내용물이 가려지게 놓았다. 남아있던 나무 패턴의 시트지를 붙여서 소파랑 색깔 톤을 맞췄다. 시트지가 별로 없어서 보이는 두 면에만 붙이고 가려진 쪽은 여전히 검은색이다. 아수라 백작같은 서랍장이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 “이사하느라 돈 쓸 일 많지 않냐”며 돈을 보내주시겠다고 할 때에 “우리 산 건 진짜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필요한 건 다 생겼어요- 돈은 진짜로 안보내 주셔도 되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진짜 그랬으니까 말이다. 대신에 살림에 이야기가 가득하다.(찍어먹어보면 조금 짠맛일지도) 없으면 없는대로‘ 하니까 집도 마음도 간소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느껴진다. 이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