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닭죽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9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였던게 기억난다. 우리집에도 꽂혀있었으니까 말이다. 초딩이던 그 시절의 나는 ‘제목이 왜이래?’하고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이제 와서야 그 의미를 납득하게 된다. 닭고기 수프가 미국에서는 감기에 걸렸을 때나 몸이 아플 때 먹는 대표적인 comfort food, 그러니까 속과 마음을 달래는 음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집에서도 닭고기 수프가 comfort food이다. 그런데 고춧가루와 파를 곁들인.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남편이 출출할 때 먹으면 좋은 음식이 있다며 부모님댁에서 찹쌀을 루팡(!)해왔다. 지퍼백에 수북히 담긴 찹쌀을 꺼내 조리대에 올려두고, 코스트코에서 사온 로티세리 치킨으로 육수를 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우리 집 첫 '빨간 닭죽'이 완성되었다.
레시피는 간단한데 손이 많이 가는 요리이다.
1. 먼저 닭고기와 뼈를 발라내고, 재료가 물에 잠길 정도로 넉넉히 물을 넣어 육수를 낸다.
2. 불린 찹쌀을 풀어 넣고, 바닥에 눌지 않게 간간이 저어가며 익힌다.
3. 발라낸 닭 살을 아주 잘게 찢어 양념에 무친다.
4. 양념한 닭고리를 죽 위에 고명처럼 올린다.
복잡한 기술은 없지만,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었다.
닭 살을 발라내고 잘게 찢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지 남편이 한참을 주방을 지켰다. 늦은 저녁에 시작한 요리는 밤 11시가 다 돼서야 완성이 되었다.
남편: ”다 됐다. 이렇게 무친 닭을 올려서 먹으면 되요. 좀 먹어볼래요?“
나: 근데… 괜찮아요??!
너무 오래 서서 불을 지키고 신경을 쓴 탓인지, 남편은 넋이 반쯤 나가있었다. 출출하고 자시고 남편의 집나간 영혼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이건 그냥 닭죽이 아니라, 남편의 ‘영혼을 갈아넣은‘ 닭고기 수프라 불러야 마땅했다. 노력과 정성으로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나니까 수저를 뜨면서부터 벌써 기운이 차려지는 것만 같다.
“이게 뭐야? 닭죽이 빨갛네요?“
이런 닭죽은 내 평생 처음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인가 싶었는데, (싱겁게도) 남편의 예전 직장동료가 해 준 걸 먹어보고는 레시피를 물어본 거라고 했다. 어느 지역 음식인지, 남들도 이렇게 먹는 음식인지 찾아보았지만 그럴듯하게 찾아지는 마땅한 정보가 없다.
예전에 유투브에서 나피디님이 어떤 음식을 먹어보고는 “50년전 음식같다”라고 표현한 걸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음식을 먹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50년은 안살아봤지만) 양념에 빠지면 섭섭할 설탕, 식초, 참기름이나 다진마늘도 없다. 닭고기에 고춧가루, 간장, 파만 넣고 끝이다. 투박하고, 멋부리지 않은 정직한 음식이다.
그렇게 이 닭죽은 우리집에 정착했다. 코스트코에서 사온 로티세리 치킨으로 육수를 내면서 시작한다. (나트륨이 많다던데.. 고민은 스쳐가도록 둔다) 남편은 오감을 활용해서 요리하는 편이다. 육수가 적당히 우러났는지는 냄새와 육수의 색으로 판단하고, 양념의 비율도 ’남편 마음대로‘다. 남편 말로는 간장 쪼르륵, 고춧가루 솔솔이라는데, 나는 아직도 그 '적당히'를 모르겠다. (그 적당히가 얼만데요…)
남편의 정성과 영혼(!)을 부재료로 갈아넣어 한 솥 가득 끓이면 일주일은 거뜬한 아침 식사가 된다.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대접할 요리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2025년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올해의 음식을 하나씩 꼽아봤다. 나는 망설임없이 이 빨간 닭죽을 꼽았다. 남편 덕분에 처음으로 먹어본 음식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올해 가장 많은 아침을 책임져준 메뉴였기 때문이다.
아침은 잘 챙겨먹지 않던 나도 이제는 남편이 끓여준 따끈한 닭죽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새로운 변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일부가 되고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2025년은 결혼을 하고, 메릴랜드로 이사를 하며 변화가 많았던 해였다. 그만큼 나의 서툰 모습도 자주 드러났고, 때로는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천천히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면서 새로운 해를 맞이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