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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Dec 04. 2022

이방인이라는 정체성  

책 <다른 삶>


한국에 갈 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래 이곳을 떠나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세어보니 어느새 10년이 넘는 시간을 한국을 떠나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면 반갑지만, 그 뒤에는 여지없이 이질감도 함께 따라온다.


내가 이곳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내가 있었던 곳을 낯설게 보는데서 오기도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보는 것에도 기인한다. 나를 ‘다르다'라고 느끼는 사람들 속에서 종종은 복잡한 마음이 된다.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카페를 찾아가고, 작고 개성있는 식당들에 열광하고, 가을 끝자락의 알록달록한 산에 올랐다. 읽고 싶었던 책이며, 질 좋은 화장품이며,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재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동시에 나는 또렷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다름'이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햇볕에 그을린 내 피부, ‘피부관리'라는 것이 연예인들만 하는 것인 줄 알았던, 마스크팩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피부 상태, 부스스한 헤어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형적인 다름 이상으로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부동산, 외모를 가꾸는 일, 한국의 티비 프로그램 같은 대화 주제가 반복해서 등장했고, 그 대화들은 나에게 신기하게 다가왔다. 길에는 외제차가 부쩍 늘어난 것 같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유형의 반듯한 차림을 하고, 좋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한국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것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이 되었음을 느꼈다. 나의 정체성은 한국적이지도 않고, 홍콩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미국식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나의 정체성까지 미국적이지도 않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럼에도 나의 생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더 이상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영어로 읽고 생각을 발전시킨 것들에 대해서 한국어로 설명할 때 번역어처럼 어색하게 느껴지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서 한 발짝만큼 빗겨 착지한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영어의 세계에서도 모국어 화자만큼의 본능적인 밀착감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자란 곳에서 느끼는 ‘다르다’라는 감정은 슬프다고도, 아련하다고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이곳에서는 온전히 나일수 없다는 사실은 조금은 서글프고, 또 반면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는 내가 지나오며 머물렀던 곳들의 생각과 감성을 흡수하며 만들어진 작은 세계가 있다. 평소에는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느낀 이질감이 이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나를 온전하게 하는 생각과 나를 지지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이 공간은 나의 해방구인 셈이다. 어쩌면, 내가 이방인으로 살았던 시간이 이 세계를 만들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말하자면 나는 깊게 뿌리내리는 일 대신 이 작은 해방구를 얻었다.


이방인이 곧 정체성이 되어버린 삶에 대해 매력적으로 풀어낸 책이 있다. <다른 삶>의 저자 곽미성 작가는 이 책에서 파리로 유학을 가면서 시작된 스무 해 남짓의 프랑스에서의 삶에 대해서 썼다. 그 시간 동안 그녀에게 익숙했던 삶에서 멀어지고, 달라져버린 삶의 외로움과 자유로움, 고유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쓸쓸함은 그 차이에서 온다. 내 마음속에서는 늘 내 집으로 남아 있는 한국이지만, 나는 점점 그곳 사람이 되지 못하고 멀어진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있고,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도 있는 프랑스지만, 그곳에서 나는 더욱더 외부인이다. p18

프랑스가 한국보다 편할 때가 많다는 건 분명하다. 한국에서의 안락함이 어린 시절부터 별다른 노력 없이 체화된 모국어 문화에서 기인한다면, 프랑스에서의 안락함은 언어를 제외한 사회문화적인 부분에서 온다. p19

20대부터 30대까지 후천적으로 형성된 세계관과 문화적 관심사는 프랑스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아무리 프랑스어가 편해져도 한국어만큼 말하고 읽는 데 자유로울 수가 없듯이, 아무리 한국이 고향 같다 해도 내 진짜 생각을 말하는 일은 프랑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더욱 자유롭다. p20


이방인이라는 자리는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언어라는 세계, 거기에 담겨있는 계급의식 같은 것들. 새로운 언어가 오면서 내면에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사실 같은 것.


외국어를 배우고, 나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온 이들은 늘 변방의 사람들이었다. p37

한때 약자였던 경험과 당연하지 않은 배려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내 안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능력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주 상기한다. 세상에는 자신도 언젠가 약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가 세상을 가르는 본질일 수도 있다. p44

외국어가 모국어를 넘을 수 없다면, 외국어로는 그 외국어에 맞는 글을 쓰면 된다. 그때 외국어로 쓰는 글은 모국어로 쓸 때와는 다른 세계가 될 것이다. p86

내게는 한국어의 세계와 프랑스어의 세계가 있다. 서울 거리의 한복판에서 남편과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나눌 때, 혹은 프랑스어를 읽을 때, 나는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먼 여행을 할 수 있다. p86


이방인의 삶은 익숙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가’부터, 살아가는 방식과 철학까지. 이방인이라는 자리의 특권이라면 외부의 생각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내면 깊숙이 내가 원하는 삶, 나에게 맞는 가치를 묻는 연습을 하는 일이다. 바로 그런 변화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준다.


눈에 쌍꺼풀이 있거나 없거나, 피부가 하얗거나 아니거나, 그들에게 나는 그저 먼 곳에서 온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서러웠던 그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해방감을 주었다. 외모 평가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이 기준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향한 시선도 변했다. p57

한편 다른 나라에 산다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압도적인 자유이기도 하다.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것은, 비로소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p92

다시 시작될 소외감과 고독에 마음이 베어 비릿하면서도, 익명의 존재로 돌아왔다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에 고조되는 양가적 감정이다. p92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해방감이 그리운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p93


자발적 망명을 떠난 사람의 동지애를 느끼며, “본인이 중력을 스스로 만들고 조절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에 대해서 공감하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코끝이 시린 추운 날씨와 따뜻한 온돌방에서 오손도손 귤을 까먹는 밤을 뒤로하고 겨울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왔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내 내면의 어떤 스위치가 켜지고, 내 안에 팽팽해지는 에너지를 느꼈다.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 다시 능동적인 개체로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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