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나갔다. 얼마 전부터 자꾸 전기가 나가서 전기회로 패널의 전력차단 스위치를 다시 올려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전기가 들어와야 하는데, 오늘은 스위치를 올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왠지 느낌이 좋지가 않다. 생각보다 큰일이 될 것 같다.
콘도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더니, 전기기사를 보내준다고 했다. 오후가 되어서 기사아저씨가 왔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기사 아저씨는 자신감 있는 얼굴로 전기회로 패널을 열어 이리보고 저리 보고 살펴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자꾸만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씨름하던 그는 단순 회로 고장이 아니고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며, 좀 더 큰 문제를 다루는 전기기사를 불러오겠다고 했다. 나는 오늘 전기가 안 돌아오면 컴컴한 샤워실에서 찬물샤워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돌아서는 기사를 다급하게 부르며, “그분은 오늘 오실 수 있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면서, “네, 아마도 그럴 거예요. 자세한 건 다시 연락드릴게요.”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다른 전기기사는 오늘 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태국에 오랜 시간 머물러본 사람은 안다. 그는 그저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 것뿐이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태국 사람들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곧잘 근거 없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다른 기사가 오늘 오지도 않을 것이며, 오늘 나는 전기가 없는 집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주변에 있는 호텔에 하루 머무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짐을 꾸려서 새로운 잠자리를 찾는 것이 더 귀찮게 여겨졌다. 문명세계에서 하룻밤 벗어나는 캠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대치를 낮추면 불편함이 별게 아닌 게 된다.
여행을 할 때 이렇게 나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조금 미련한 선택을 한다. 평소보다 너그러워지는 것이라고 멋있게 포장하고 싶지만, 사실은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가 귀찮아서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한 것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기가 있는 새로운 잠자리를 찾는 대신, 전기가 없는 집에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해가 지는 저녁이 되면 초를 켜고 밤을 보내기로 한다.
해가 지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편의점에 가서 초와 라이터를 사 왔다. 건물의 경비아저씨가 내 상황을 전해 듣고는 어떡하냐고 걱정을 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마이 뺀 라이 ไม่เป็นไร"라고 대답했다. 태국인들이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뭐, 어쩌겠어요라는 뉘앙스로 괜찮다고 말하는 표현이다. 태국사람들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 순간에 자주 마이 뺀 라이라고 말하며 웃어 넘긴다.
갑자기 차가 고장 나서 회사에 늦을 것 같아도 마이 뺀 라이,
애써 찾아간 가게가 예고 없이 문을 닫아도 마이 뺀 라이,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와도 마이 뺀 라이,
버스가 예정 시간을 한참을 지나서도 도착하지 않아도 마이 뺀 라이하고 기다린다.
태국 사람들은 쉽게 스트레스받거나, 걱정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있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마음의 평정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내 삶에 불편을 가져올지언정, 내 마음의 평정까지 앗아가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집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작은 접시를 모아서 초의 받침대로 쓰기로 했다. 내가 초를 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손으로 뭘 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편), 막상 닥치니 서바이벌 스킬처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초를 켜고 옆으로 기울여 촛농을 떨어뜨리고 대여섯 방울의 촛농이 모이면 굳기 전에 초를 세워서 고정을 시켰다.
다섯 개를 만들었는데, 거실에 두 개, 침실에 두 개를 세웠더니 생각보다 밝아서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저녁 7시가 되기 전에 켰는데, 3시간쯤 지났더니 거의 다 녹아서 불빛이 잦아들었다. 초가 다 녹아버렸을 때 나도 어느샌가 스르륵 잠에 들었다.
다음날 오전에 다른 아저씨가 와서 전기가 돌아왔다.
전기 없이 보낸 하룻밤은 마이 뺀 라이 ไม่เป็นไร, 의외로 문제없이 지나갔다. 이곳 사람들에게 웃어넘길 줄 아는 여유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