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도 May 18. 2023

10년 간의 월세 생활을 정리하던 날


돌아보니 홍콩에서 일했던 지난 10년간 착실히 월세를 내면서 살았다. 늘 내년에는 떠날 것 같은 마음이었기때문에 집을 산다는 옵션을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해 한해가 흘러, 어느덧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집주인의 모기지를 착실하게 보태주고 있었다.


이사올 때 반짝이던 우리 집도 좋았는데, 10년을 넘어가면서 하나둘씩 마모되어 가는 집도 정겨웠다.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에이전트가  “거실과 침실에서 보는 야경이 끝내줘요."라고 했었는데, 막상 살면서는 찬찬히 야경을 감상한 적이 있었나 싶다.


그래도 이 집은 내가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느낀 공간이었다. 한국에는 가족이 있는 본가가 있지만, 며칠 지내다보면 곧 내 물건과 익숙한 동선이 있는 이 집이 그리워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홍콩에서 계속 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다정하지는 않은 이 도시가 나는 늘 버거웠다. 이곳에서 산다면 우리는 언제고 서바이벌 모드로 살아야 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이 자꾸만 가난해질 것이었다.  


좋았던 것들만큼이나 싫어했던 것들의 리스트가 길지만, 여전히 이곳에서의 경험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확히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떠나고 나서 조금 시간이 지나 적당한 거리가 생기고나서야 보일 것이다.



이사를 준비하면서는 아주 질퍽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사하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전세를 전전하며 2-3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그때마다 엄마가 혼자서 5인가족의 짐을 모두 싸고, 또 새로운 집에 다시 우리 짐을 풀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나는 이제야 왜 엄마는 이사가 한번 끝날때마다 한동안 앓아누웠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짐정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었다.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크고 작은 수납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짐들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방하나를 정리하고 돌아서면 내 짐인데도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머리가 아팠다. 언젠가 필요할까 봐 고이 간직해 둔 잡동사니를 보면 나는 참 찌질한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항공사에서 받은 무료 파우치는 왜 이렇게 모아뒀을까, 유럽여행 때 사고 한번 신은 샌들이나 원피스는 이제 아마도 입을 일이 없을 텐데, 왜 내 옷장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짐정리를 하면서 유일하게 좋았던 건, 그동안 받은 편지를 다시 읽게 된 것이다. 남편은 매년 “한 해 동안 너와 함께 좋았던 일들, Top 5” 리스트를 만들어서 카드에 써주었다. 내 인생의 역사가 담긴 글들을 읽으면서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내가 홍콩으로 처음 떠나왔을 때에 써주었던 편지를 발견했다.


네 가치를 저울질하려고 하지 말거라. 그건 노력하지 않아도 거기에 있는 거니까.
화려하게 반짝이는 야경 아래에서 니가 힘들고 고될까 걱정된다. 그냥 다가오는 일들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지 않겠니.

10년 전의 나에게 했던 엄마의 조언이 지금의 나에게도 와닿아서, 마음이 많이 저릿했다. 한동안은 그 편지 속의 말들을 되새기며 살았다. 하나씩 해체했다가 다시 되붙였다가를 반복했다. 다정하고 지혜로운 말들이 내 마음을 맴돌았다. 그 말들 덕분에 울기도 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는 감정의 변곡점이었다.


내가 회사를 떠날 때 받은 카드도 있었다. 동료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글들에 조금 웃음이 났다. 그리워할 것이라고 해야 할지, 힘내라고 할지, 엄마는 괜찮아지실 거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메세지들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런 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지만.


이토록 차갑고 냉정한 도시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난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내가 엄마의 소식을 알리며, 한국행을 이야기했을 때 내 보스는 언제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다며 퇴사 대신 휴직을 권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회사에 적을 두고 있으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며. 그리고 혹시라도 병원비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친절이었다.


회사의 책상을 정리하던 날, 친한 동료 몇 명이랑 회사 건물 아래의 펍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다니기 싫었던 회사였는데,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아쉬웠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회사였고, 꽤나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었고, 나름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삶이었다. 이 생활이 끝나기를 바란 건 내 자리의 문제라기보다, 직장인의 삶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란 나의 문제였다. 직장인으로 누릴 수 있는 꽤나 좋은 자리였다는 생각에 나는 염치없게도 아쉬워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그만둘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이라고 매일매일 기도했던 주제에.


나에게 한국행은 본가로 돌아간다는 말이었고, 그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탈출했던 그 삶으로의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머리가 어질 할 지경이었다. 같이 있던 동료가 한국에서의 삶은 어떨 것 같아?라고 물었을 때, 나는 “가면을 써야 하는 삶”이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얼른 돌아와.라고 했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가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나 다른 집단에서는 저마다 다른 가면을 쓰니까. 내가 말한 건 한국이라는 곳의 제약이 아니라, 내가 속한 가족이라는 굴레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도.

 



짐을 줄이고 줄여서, 대부분의 것들은 무료 나눔으로 내놓았는데도, 내 앞에는 여전히 많은 박스가 쌓여있다. 거기엔 정말 필요한 필수품만 남은 건지, 아니면 아직 내려놓지 못한 집착이나 미련이 남은 것들인지 모르겠다.


이 귀걸이가 필요한가 아닌가, 이 책은 소장할만한가 아닌가, 어떤 옷은 간직하고 어떤 옷을 내놓을 것인가를 정하는 일은 상당히 많은 두뇌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사를 하면서 드디어 내 공간에 있는 모든 물건들과 다시 만나고, 그것들의 가치를 매겼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지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일이 끝나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금 당장 불이 나서 집을 탈출해야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편지를 모아둔 그 작은 박스만을 챙겨서 나갈 것이다. 그거 하나면 된다. 그거 말고는 이 집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대체가능하다.


그렇게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이사를 끝내고, 10년 간의 홍콩에서의 월세 인생이 막을 내렸다. 집주인에게 열쇠를 넘겨주면서, 그동안 (대체로) 고마웠다고 인사를 했다. 어쩌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중요한 한 챕터였을지도 모를 그런 시간이 끝이 나려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콩에 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숨겨진 장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