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럭 클럽>의 작가 에이미 탠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IBM의 비즈니스 콘텐츠 작가였던 그녀가 어떻게 소설이라는 장르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지, 그리고 처음 쓴 자전적 소설 <조이럭 클럽>의 큰 성공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조이럭 클럽>은 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어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 본인의 가족 이야기이자, 그녀에겐 삼촌, 이모와 같았던 다른 세 가족 - 중국계 이민 가정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중국에 있는 그녀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녀의 부모가 1940년대 중국의 빈곤, 정치적 혼란을 피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오고, 그렇게 미국에서 태어난 그녀가 이민 2세대로 살아가며 풍파를 겪는 3대에 걸친 이야기다.
소설 <조이럭 클럽>에 나오듯이 그녀의 엄마는 자살 충동으로 늘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녀가 엄마와 말다툼을 할 때마다 엄마는 ‘죽어버리겠다’ 거나, ‘널 죽이고 나도 따라 죽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여든 이후에 치매에 걸려 대체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데, 그러다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는 오랜만에 듣는 또렷한 말투로 “내가 너에게 이제껏 많은 고통을 끼친 걸 안다. 정확하게 어떤 일들이었는지 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기억이 이렇게 희미해진 것처럼, 내가 너에게 끼친 고통도 너에게 언젠가 희미해지고 그래서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에이미는 그 한마디로 마음속의 미움이 스르륵 녹아버렸다고 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한 사람과 완전한 화해를 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 말을 하면서 연신 눈물을 훔치는 그녀는 그 순간 60대의 문학의 거장이 아니라, 그저 엄마가 보고 싶은 작은 아이 같았다.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읽었던 찰스 부코스키의 시가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하고 머리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며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밤 8시면 소등을 하고,
새벽이면 커피 향과 베이컨과 스크램블에그로
아침을 열었다.
내 아버지는 평생을 그런 철저한 루틴을
따르며 살았지만
일찍 돌아가셨고,
돈도 별로 벌지 못했고,
내 생각엔 그리 현명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그 조언을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늦게 잠에 들고,
늦게 일어나는 삶을 살았다.
지금의 내가 거창한 성공을 이루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무자비한 아침 출근길의
교통체증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좀 이상하지만 멋진 사람들도 만났다.
그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아버지가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 한 사람
이 두 작품 모두 작가들이 아주 깊이 마음속을 휘저어 내려가 작고 가여운 아이 같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꺼내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현명하고 어른스러운 지금의 모습이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외롭게 그 작은 아이를 보듬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에 마음이 한없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