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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Apr 05. 2020

완전한 스웨덴의 여름

다음 날이 되어 조카들을 만났다. 제시카가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아이들은 전남편의 집과 그녀의 집에서 일주일의 반을 나누어 보낸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훌쩍 자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5살이었던 리암은 이제 8살이 되어 2학년이었고, 막 돌이 지났던 엘라는 벌써 4살이 되어 뭐든 ‘내가 혼자 할게'라는 말을 하는 독립적인 어린이가 되어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아이들이 조금 낯설어하지 않을까 했는데, 만나자마자 얼마 전에 본 것처럼 아이들은 우리에게 조잘조잘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리암은 새로 지은 학교 건물이 마음에 들고, 보이스카웃에서 캠핑을 가는 것이 너무 좋다고 했다. 엘라는 리암이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거기에 더해 엘사 공주를 너무 좋아해서 드레스 두 벌을 갖고 있었다. (제시카는 이를 ‘디즈니의 노예가 되는 길’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여름 별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남을 일정을 보낼 예정이었다. 스웨덴에서는 도시에 살면서 근교에 이렇게 주말 별장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라고 했다. 별장은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아서, 가족들끼리 시간을 나눠 공유해서 쓴다고 한다. (우리가 지내는 동안에도 다른 친척이 함께 머물렀다) 그들의 별장이 있는 곳은 큰 호수를 끼고 있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집은 생각보다 크고 근사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소박함이 있으면서도, 북유럽 스타일의 모던함이 있었다.

집은 세 개로 구성이 되어있었는데, 메인 하우스에는 넓은 거실과 주방, 세 개의 방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원룸으로 된 게스트 하우스가 있었다. 뒷마당에는 창고처럼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곧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로 바꿀 예정이라고 했다. 자연 속에 둘러싸여 조용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의 느낌에, 공간이 주는 위안이 있다면 이곳은 힐링을 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옆집 마당에 있는 트램펄린으로 달려갔다. 성인이 뛰기에도 끄떡없을 만큼 큰 트램펄린이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집이라며, 아이들이 트램펄린을 뛰기 시작하자 이웃 아주머니가 반가워하며 나와서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에게 언제든 와서 편하게 놀다 가라고 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맛있는 스웨덴 치즈를 올린 토스트로 아침을 먹고, 걸어가서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엔 트램펄린을 뛰거나,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서 햇볕을 쬐며 책을 읽었다. 조금 나른해지면 낮잠을 자거나, 아이들과 함께 15분쯤 걸어가면 있는 키오스크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마을에 새로운 게스트가 왔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이웃집의 아이들이 놀러 오기도 했다. 외부인이 드문 작은 마을이다 보니 외국에서 온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신기한 듯했다. 금세 친해져서 공놀이, 인형놀이, 주방 놀이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놀았다.


아이들이 주는 건강한 에너지가 좋았다. 사실 가기 전에는 일주일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 둘러싸인 일상이 익숙지 않은 우리는 높은 텐션으로 놀아주어야 하는 역할에 지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떠날 때가 가까워져 오니 아쉬웠고,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다. 평소의 나와는 다르게, 일어나서부터 저녁까지 그 에너지 넘치는 정신없음이 좋았고, 새로운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조건 없이 쏟아붓는 애정을 받았던 그 따뜻한 친밀감도 좋았다.


리암과 했던 인상적인 대화가 있다. 적당히 서늘한 아침저녁과, 딱 기분 좋을 만큼의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이 환상적인 여름 날씨를 생각하면, 혹독하다고 알려진 스웨덴의 겨울이 상상되지 않는다며, 나는 조카에게 길고 혹독한 겨울을 어떻게 견디는지 물었더랬다. 아이는 “음-”하고 잠깐 생각을 하더니, 겨울을 ‘견디듯' 살지 않는다고 했다. 겨울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기 때문에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좋다고 했다.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는, 아마도 겨울에 즐기는 스키와 겨울 수영에 대해 말하고 있었겠지만, 왠지 나에게는 내가 지나고 있던 마음의 겨울에 대해 하는 말처럼 들렸다. 마음이 추운 시기를 지나며, 그래서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이 터널의 끝이 보이고, 마음에 봄이 찾아올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겨울에도 삶은 계속되고, 이 시기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나에게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우리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서야 했던 우리를 위해 시누이는 일찍 일어나서 우리가 좋아했던 치즈를 가득 넣은 토스트를 만들어서 가는 길에 먹으라며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꼭 택시 타고 가라며 비싼 택시비를 하고도 남을 돈을 한사코 괜찮다고 사양하는 내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이 곳에의 시간이 종종 생각이 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머리가 쭈뼛설만큼 차갑지만 익숙해지면 피부에 닿는 시원한 물의 감촉이 너무 좋은 이곳에서의 수영도, 간단히 차려서 맛있는 와인을 곁들여 먹으며 긴 대화로 채워졌던 저녁이, 헤어지며 “안녕 나의 꽃”이라고 했던 이웃집 꼬마에게서 들은 내 생애 가장 스위트한 말이. 그 기억들이 내 겨울을 잔잔하게, 오래 덥혀줄 것이다.


지난 내 생일에 제시카는 안부를 묻는 긴 메일을 보내왔다. 리암과 엘라는 내 생일에 어떤 케이크를 먹었는지 궁금해했다. 맛있는 당근케이크를 두 조각이나 먹었다고, 그리고 다음 여름에 또 트램펄린을 뛰자는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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