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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Jan 30. 2021

호머의 꿀보다 더 달콤한 영업자의 자부심

백전백승하는 최팔룡의 영업일기(1)

그렇잖아도 푹푹 찌던 그 여름날에 서대문경찰서 앞 그 담배가게에 앉아 있으면 짜증나게 답답했다. 면적은 4평 남짓에 매점이라고 하지만 물건이라고는 담배와 간단한 음료 정도가 다였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복층 형태로 다락을 만들어 놓았다. 덕택에 좁은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활용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곳에서 무슨 소매점씩이나! 필순 사장님에게 그 공간은 귀찮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삶의 공간이었다.    

 

그분과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나의 임무는 그 공간의 임차권을 적당한 가격에 매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인근 부동산에 가게를 내놨는데 2개월째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약간의 인테리어 비용을 들인 것도 있었고 필순 씨가 몇 달 동안 영업을 하면서 쌓아놓은 신뢰가 있어서 700만 원 정도 권리금을 받으려고 했었는데 공인중개사는 마뜩찮은 표정만 짓더란다. 물론 현재 보유 중인 담배 재고 300만 원은 별도로 했다. 전혀 연락이 없는데다 가게 운영하는 것을 빨리 관두고 싶어서 권리금을 아예 받지 않으려고 했더니 연락은 좀 오긴 하지만 승계 계약이 도통 이루어지지 않아서 속상하다고 하였다.     


필순 씨를 만난 오후에 내가 읽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온갖 잡지식을 섭렵한 지식인으로서 요즘 말로 하자면 만물박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의 시인 호머가 “분노는 뚝뚝 떨어지는 꿀보다 훨씬 달콤하다”고 했다는데 이에 대해 그가 나름대로 분석을 해 놓은 대목이 있었다. 분노할 대상이 존재하고 복수가 가능하다는 기대를 품게 되면 그 기대가 가져오는 희망 때문에 대체로 즐거워진다고 설명한다. 몸이 아파서 출근하기도 어려운데 팔리지도 않는 가게에 앉아 있으면 짜증만 난다는 필순 씨가 생각났다. 상의할 남편도 없고 자식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그녀의 짜증은 이해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희망 같은 걸 선물할 수 없다면 분노가 넘쳐 꿀처럼 달게 느껴지도록 해드릴 수는 없을까? 그런 공상에 빠졌다. 잠시라도 그녀의 짜증을 멈출 수 있다면!     


나의 17년 영업 인생에는 호머의 꿀 떨어지는 분노가 얼마나 녹아 있었을까? 찬란한 희망 같은 걸 품고 있어서 대체제로서의 분노는 필요 없었던 것일까? 양쪽 가설 모두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프로 영업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서 두 가지 가설은 모두 배척된다. 나는 본인의 일을 하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서 호머를 읽을 수도 있고 시시껄렁한 영화를 봐도 된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발을 보면서 먼 남극에서 근무하는 사람의 시린 발자국을 생각해도 문제없다. 나도 오늘 백짓장처럼 하얀 지면을 머릿속에 펼쳐서 점점이 묵을 찍어 본다. 분노는커녕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무한한 자유에 감사하게 된다. 영업에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동료들이여! 그대들에게도 나의 따뜻한 감사의 기운을 나누어 보낸다.     


이틀 뒤 나는 필순 씨의 싸늘한 가게로 다시 돌아왔다. 일단 인근 부동산의 위치가 대략 어떻게 되는지 탐방을 해 본다. 모두 찾아가서 설명할 필요는 없고 5개 정도를 선정하여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보증금이 얼마고 월세가 어떻게 되는지 핵심적인 사항만 전달하면 된다. 필순 씨의 몸이 가게를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어찌 나의 노력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주변의 지물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내 힘의 몇 배를 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인터넷 직거래 사이트에도 물건을 올려놓는 것이 좋다. 워낙 위치가 좋고 그에 비해서 차임이 부담 있는 수준은 아니니까 도전해보고 싶은 예비창업자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성의 있게 사진을 촬영하고 텍스트를 써놓으면 충분하다. 그렇게 기다려본다. 진인사대천명 같은 거창한 간판은 필요 없고 물고기를 기다리는 강태공으로 충분하다. 삶의 낭만을 아는 프로 영업자는 그래도 된다.    

 

며칠 후에 필순 씨에게 연락이 왔다. 권리금 300만 원에 가게가 빠졌다고 정말 기뻐한다. 무권리금이라고 써놓으면 세상 사람들이 우습게 본다는 내 충고를 들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나의 공을 한껏 치하한다. 이럴 땐 정말 으쓱해도 된다. 내가 아니었다면 필순 씨는 아직도 그 가게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었을 것이다. 권리금은커녕 재고에 대한 대가도 한 푼 못 받고 거기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경영지도는 이번에도 압도적으로 옳았다. 그렇지만 필순 씨에게는 당신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해준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영업자인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고 해주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당분간 나에게 꽉 붙잡힌다.      


나는 여기에 두 가지의 첨가 요소를 더 해주어 가게의 마무리를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첫 번째는 점포 철거비라는 명목으로 지원금을 받도록 해주는 것이다. 철거라는 것이 실내를 완전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준다. 그럴듯하게 작업을 해 놓으면 철거 담당자가 응당한 대가를 받게 되고 필순 씨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 필순 씨 본인이 취업을 하면 몇 달 후에 100만 원의 전직장려수당이라는 것도 받을 수 있다.     


필순 씨의 목소리 톤은 이제 나긋나긋해졌다. 짜증나는 톤의 당신 목소리는 원체 당신과 인연이 없었던 것이었는데 그 당시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가게 때문에 다니지 못했던 병원에도 다녔고 수술도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취업도 했다. 본인이 대단한 대접을 받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영업자 최팔룡의 자부심이 하늘에 닿아 필순 씨보다 행복했다. 우리 필순 씨의 건승을 다시 한 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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