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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팔룡 Dec 24. 2021

접종 생체 정보를 이실직고하렷다!

접종정보를 대중 앞에 밝혀야 사는 세상

우리 모친의 코로나 접종 정보를 찾아볼 일이 있었다. 본인이 아니면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친의 예방접종 정보를 떠들어 볼 수 있게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라고 한다면 인터넷에 접속해서 시시콜콜한 생체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코로나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평생의 예방접종 정보가 한 번에 출력이 된다. 번거로운 동의 절차 없이 쉽게 처리가 돼서 편하긴 했는데 정말 우리 잘하고 있는 것일까?


전 국민의 접종 정보가 집적된 질병청 전자문서고(서버)에 네이버, 카카오, SK텔레콤, KT가 손쉽게 접근하여 데이터를 빼올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이라는 증명은 휴대폰 주인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본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전자신호만 있으면 질병청 전자문서고가 열려 정보가 표출된다. 내가 단순히 국가 기관 하나와 대기업 몇 개를 나열했지만 여기에 연관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한 번 제대로 뚫으면 전국민의 접종증명은 그들의 손에 들어간다. 가끔 에러도 발생하고 다른 사람의 정보가 내 휴대폰에 인식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결코 완벽한 시스템은 아니다. 소위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코로나를 걷어낸다는 명분만 있으면 전국민을 대상으로 아찔한 개인정보 곡예를 하는데 어느 하나 문제제기를 하는 집단도 없는 것 같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지만 코로나는 암행어사 마패처럼 개인의 사회적인 권리를 싸그리 유보시킨다.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무력화하는 정도이니 다른 사회적 권리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학생들 교육권 같은 것은 일찌감치 내팽개쳤고 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관공서 출입구 같은 것들도 예전에 틀어막혔다. 이렇게 난리 난리 생난리를 치는데도 코로나라는 놈은 안 잡힌다. 유별나게 자유권을 박탈해보면 잠시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그 때뿐이다. 다시 위험도가 높아진다. 


그렇게도 개인의 자유권을 선구적으로 옹호해왔다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가장 엉망으로 엉켰다. 자유권도 내팽개치고 코로나도 많이 걸렸다. 반면 엉성해보이던 나라들은 이제 해결국면에 돌입했다. 인도, 일본 같은 곳들은 전망이 좋다. 개인의 자유권에도 제약이 덜하고 코로나는 어느덧 집단면역 언저리에 왔다. 우리처럼 앵글로색슨들을 얼빠지게 추종한 케이스는? 그야말로 바보가 됐다.   


손바닥만한 식당에 가도 자신의 예방접종 이력을 대중들 앞에 실토해야 식사를 할 수 있다. 유럽의 어떤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당장 이렇게 됐다. 조용히 공무원한테 문서를 제출하는 것도 아니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주사를 2번 맞았는지, 3번 맞았는지 확인해줘야 한다. 도대체 그 식당 종업원과 내가 전생에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조용히 정보를 주고 받는 것도 아니다. 식당에 사람들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실내 공간에 개인의 생체정보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속절 없이 개인의 인격권을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제도다. 주사를 맞은지 14일이 경과되었다며 안심하고 밥을 먹는다. 


생체정보를 대중들 앞에 솔직히 고해 바쳐야 정부의 방역 지침에 충실하여 착한 시민이 되는 법이다. 대관절 접종증명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화학약품을 주사기에 넣어서 몸에 주입을 했다는 증명이다. 그것도 최근 6개월 이내에 그 물질을 집어넣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통과하게 되어 있다. 2번째 집어넣은 사람은 넣은지 14일이 경과해야 하고 3번째 집어넣은 사람은 그 경과 기간이 필요 없다. 이렇게 꼼꼼한 규정을 보건소나 질병청에서 관리하는 거라면 할 말이 없는데 구멍가게 사장님들까지 알아야하는 세상이라니 기가 막힌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더 그렇다. 종이로 된 증명서를 들고 다니는데 가게 사장님이 질병청 지침에 따라 문서의 효력을 판단해야 한다. 쌍팔년도식 종이문서로 정부가 요구하는 생체정보 증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다. 시내버스 요금으로 현금을 받지 않고 전자지갑만 받는 경우도 많아지는 세상이니, 나의 특수한 고집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아무리 둔감한 사람일지라도 이제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좋겠다. 20년 코로나 초기에는 가게에 입장할 때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도록 법적으로 의무화했다. 이름, 상세주소가 터무니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전화번호만 기입하도록 바꿨다만, 여전히 개인의 배타적 소유물에 대한 식별 정보를 여기저기 뿌려야 한다. 휴대폰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이며 국가가 구입해 준 휴대폰도 아닌데 왜 그 정보를 적고 다녀야 하는지? 


곧바로 QR을 찍고 다니는 세상이 열렸다. 내 이동 정보를 포털과 질병청에 낱낱이 보고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은 백신패스까지 오는데 있어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지금의 백신패스 소동에 비하면 그저 몸풀기 예비운동이 아니었을까. 3차접종을 놓친 사람에게 "삐빅" 소리가 들리도록 해놨다는 공무원은 그런 조치가 너무 징그럽다는 타박을 듣고, 그래도 가게 점주가 편하니까 좋은 거라고 하였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백신패스를 몸에 심어 40년 끄덕 없이 유지되도록 추진하는 무리들도 있단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편리이고 무엇을 위한 정보 집적인가. 


이렇게 해서 수 천 명, 수 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백번 양보하여 모두 구할 수 있다고 치자. 인간의 자기 결정권과 사회적 권리, 자유권까지 싸그리 팔아먹고 나서 얻은 목숨이 참으로 대견도 하겠다. 생체정보 집적과 집착적인 격리로 목숨을 많이 찾았으니 참으로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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