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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Jul 16. 2020

비라도 내리지 않고서야 멈추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농동 61-2

놀이공원에 왔는데 하필 비가 올 게 뭐람. 난 지금 비 내리는 육림랜드에 왔다가 신발이 쫄딱 젖는 바람에 비를 피해 휴게실 처마 밑에 들어와 있어. 회전목마도, 범퍼카도, 바이킹과 여기 바로 앞에 있는 대관람차도. 이렇게 멈춰있는 모습이 너무 낯설다. 폐장한 놀이공원이 아니고서야 멈춘 놀이기구를 볼 일이 뭐가 있겠어. 비 오는 날엔 놀이공원을 안 가고 말겠지.

근데 오늘은 여기 오는 도중에 갑자기 비가 내리는 거야. 급하게 우산을 샀는데, 돌아가자니 아쉽기도 하고 마땅히 다른 목적지를 알아본 것도 아니고 해서 들어왔지. 매표소에서 TV를 보시던 아주머니가 나를 의아하게 보시길래 원래 비가 오는 날이면 종종 이렇게 오던 춘천 사람인 양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어. 입구에서 두리번거릴 때 이미 들통났으려나?

발이 다 젖는지도 모른 채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을 휘젓고 다니는데 바이킹에 유독 눈길이 가더라고. 자비 없이 파도 위를 내달렸을 바이킹에 붙박이처럼 박혀있는 선원은 여전히 먼바다를 가리키며 뭔가를 외치고 있더라. 그러고 보면 회전목마의 말들이나 코끼리 덤보는 여전히 달리는 시늉을 하고 있고, 모노레일 기차의 제일 앞칸 토마스도 눈썹을 휘날리며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말했지? 죄다 멈춰있다고. 그런 걸 하나씩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어. “바보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면서, 숨이 차 죽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숨이 차면 잠깐 서서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거나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될 일인데 말이지. 나는 숨이 차지 않는 법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 뒷덜미를 잡아 세우지는 않아. “쉬어가도 괜찮아요”, “조금 늦게 가면 어때요?” 같은 따뜻한 말을 건네기가 머쓱한 게, 내가 그 사람들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니깐. 멈춘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는 사람들이 많아.

나도 예전 직장을 다닐 때, 잠깐 햇빛을 쐬러 나왔다가 직장 선배를 붙들고는 대뜸 울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 “저는요. 치열하게 살기가 싫어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치열하게 살기 싫다, 치열한 삶이 싫다, 치열하게 못 살겠다 하면서 말만 조금 바꿨을 뿐이지 결국 같은 소리를 연신 반복했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부끄러운 기억이다. 사실 그때도 다 울고 나서는 코를 풀며 “저 방금 되게 사회초년생 같았다. 그쵸?” 하고 멋쩍게 웃었어.


당시에는 세상에 다양한 종류의 바닥이 존재하는 게 무서웠어. 이 바닥에서는 질리면 끝이고, 저 바닥에서는 도태되면 끝장이다 이런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어야 했으니까. 나는 어느 방향으로 몸을 틀어도 낭떠러지가 있고, 잠시만 숨을 고르려 했다가는 금세 벼랑으로 밀리는 어딘가에 선 기분으로 꾸역꾸역 출근했지. 똑똑한 사람들,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적당히 알고 소신껏 게으른 사람이라 자꾸 작아졌나봐.

그래, 그쯤이다. 아침마다 네 노래를 들었던 때가. 나 내가 되게 이성적이고, 감정 조절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땐 출근길에 정말 많이 울었어. 울면서 네 노래를 재생하고, 네 노래를 듣다 또 울고, 그러다 보면 내릴 역에 다다랐지. 요즘 같아선 “뭐? 내 노래 듣고 울었다고? 흐에. 그러지 마.”라고 말할 널 떠올리면 몰래 자존심이 상해 눈물이 쏙 들어갈 텐데 말이야. 그때는 그럴 틈이 있었나 뭐.

그래도 너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조금씩 멈출 준비를 했던 것 같아.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끼익- 하고 설만큼의 용기는 없었지만, 멈춰 설 자리를 살피면서 조금씩 속도를 낮췄겠지. 당장에 닥친 일들 앞에서는 멈추기가 어려운 것 같아. 갈등이 깊어졌을 때는 관계를 정리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그렇고. 무슨 수라도 쓰고 싶고, 어떻게든 극복하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는 탓일까?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줄 알면서도 내달리게 되지.

나를 멈추게 하는 건 뭐였을까? 문득 행인의 옷 벗기기 내기를 하던 바람과 태양의 이야기가 떠오르네. ‘누가 먼저 저 사람의 옷을 벗기는지 내기하자’ 던 바람이 세찬 입김을 불수록 행인은 옷깃을 여미며 뛰어갔지만, 태양이 따사로운 햇볕을 내리쬐니 행인이 스스로 옷을 벗고는 손부채질을 하며 쉬어갔다는 우화지. 우리를 쓰러지지 않게, 전보다 더 강하게, 포기하고 싶어도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건 아마도 따뜻한 토닥임 같은 거겠지.

여기 모든 것이 멈춰 있는데 그 조용한 틈에 투둑 투둑 빗소리가 들리는 게 너무 좋아. 둔탁한 놀이기구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해봐. 알록달록한 놀이기구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미끄러지는 모습도. 다치지 않고서야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슬퍼. 어떤 이가 “출근길에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고 하자, “어차피 병원에 입원해서라도 끝내야 하는 업무”라며 시큰둥하게 받아치던 사람, 그 끝엔 “그럼 죽어야 되려나?” 말하면서 함께 자지러지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나는 되는 대로 자주 아파하고 어쩌다 보니 곧잘 멈추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건 내가 운이 좋았거나,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거나,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겨먹은 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에게 와 숨이 차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나 출근하다 차에 받혀 죽고 싶다는 사람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겁이 났는데, 이제 그 사람들을 좀 토닥여주고 싶다.

“내가 주인인 놀이공원에 비가 내리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기다렸던 단비가. 좀 아쉽긴 해도 오늘은 놀이기구를 돌릴 수가 없겠네. 오늘은 놀이공원 개장을 안 해도 괜찮은 날이겠어. 비 오는 소리나 들으면서 빗방울이 떨어져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야겠구나. 그렇게요.”

멈췄다가 다시 일어날 때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거라 믿어. 우리 삶이 롤러코스터처럼 항상 극적이진 않을 거고, 또 회전목마처럼 늘 잔잔하게 어슬렁거리지도 않을 테니까. 이렇게 삐걱댈 때는 꼭 멈춰 서기로 약속하자. 춘천을 방문했을 때 비가 오는 날에는 다시 여기에 오고 싶어. 멈춰 있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문득문득 멈추게 되더라도 그게 대수롭지 않아질 때까지, 나도 더 자주 멈추고 싶다.


- 아직 날이 갤 생각을 안 하지만,  그새 요 앞은 기웃거려 봄 직한 육림랜드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25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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