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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Jul 17. 2020

그저 잘 끝내고 싶을 뿐인데 그게 어려워.

근화동 8-1

마지막 날이다, 오늘. 춘천 여행 말이야. 나는 보통 마지막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하는 편이야. 마지막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바둥거리다 보면 진짜 마지막이 왔을 때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 알아? 반대로 마지막을 너무 오래 준비하면 애초에 모든 게 끝장난 것 같은 채로 얼마간을 견뎌야 하기도 하고 말이야.

나 어릴 때 부모님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셨었어.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됐을 때도, 군대 가는 사촌 오빠를 배웅하러 간 날에도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혼이 났지, 왜 마지막이라는 말을 쓰느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애한테 너무 구구절절하게 가혹한 핀잔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 덕에 나는 항상 마지막 앞에 당분간이라는 여지를 남기는 구구절절한 사람이 되었어.


그래서 말인데, 오늘 춘천에 온 것이 당분간은 마지막일 것 같아. 춘천 아닌 어디라도 당분간은 쉽게 떠나지 못하게 될 터라 아쉽다. 최대한 덤덤하게 마지막 여행지를 고민해봤는데 역시나 소양강이야. 흐르듯 와보니 소양강이더라고 운치 있게 말하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런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지난번인가 지지난번에 왔을 때부터 마지막 날에는 소양강에 가봐야겠다고 미리 생각해뒀었어. 언제였더라, 하여간 어느 여름, 춘천에 완전히 처음 왔던 날에는 경춘선에서 내리자마자 소양강에 왔었는데 그때 그토록 헤맸던 길, 춘천역에서 소양강 사이의 길을 이제는 눈 감고도 다닐 수 있게 된 것 같아. 웃기지?

소양강은 너에게도 참 특별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네가 소양강에서 노래를 자주 만든다 그랬지.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늘 앉는다는 의자 얘기도 했잖아. 책도 잘 읽지 않는 네가 언젠가 시집 한 권을 들고 가 지금 읽고 있다면서 사진을 찍어 보냈을 때, 나도 저 소양강에 다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전에 어떤 마지막에 다다랐는데 그게 끝인 줄도 모르고 뒤꽁무니를 졸졸 쫓던 일이 있었어. 언젠가 내가 자주 들었던 말처럼 “왜 마지막이라고 하냐”는 얘기를 똑같이 하면서 말이야. 빈말이라도 “당분간”이라고 한마디만 해주지. 그럼 내가 그 ‘당분간’은 보채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보기라도 했을 텐데, 난 또 그렇게 기다리다가는 다른 일에 금방 빠지는 편이니까 그와 내가 이보다는 덜 껄끄러운 사이로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여간 나는 그 “당분간”이라는 말을 들으려고 둘이 자주 가던 강변에 매일 나가 있었어. 그러고 보면 나 진짜 집요한 데가 있었네. 거기 어디쯤 걸터앉아 있다가 아직 끝내지 못한 나의 끄트머리를 만나면 우연히 본 척 놀라기도 하고, 일부러 나와 있던 걸 들켜서는 바보 같이 웃기도 했어. 흐르는 강물의 결만 세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날이 훨씬 많았지만.

사람마다 마음속에 슬픔을 담는 양동이 같은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각자 자기 몫만큼의 슬픔 말이야. 어떤 사람은 크고 깊은 슬픔을 잔잔하게 게우면서 평생을 살아갈 거고, 또 누군가는 자꾸 차고 넘치는 슬픔을 매번 바들거리며 털어내야겠지. 나의 슬픔을 얼만 한 크기에 담기려나 생각해보다 나는 흘려보낼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아챘어. 보내줄 수 있을까.

흐르는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에 뭐라도 실어서 같이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만 그래? 강이나 계곡, 빗물은 당연하고 하다못해 수도꼭지나 변기 물 내려가는 걸 봐도 그러고 싶어질 때가 있어. 흘러간다는 건 아무래도 아름다운 거겠지? 여기 나 말고도 뭔가를 흘려보내려는 사람들이 흐르는 강을, 그리고 흘러간 강 너머를 가만히 보고 있어. 물론 내 짐작일 뿐이지만.

난 사람들 구경하는 걸 좋아해. 영화에 나오는 투명망토가 진짜로 있다면 난 그걸 뒤집어쓰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가서 사람들을 실컷 들여다보고 싶어. 내 친구는 이런 나더러 엉큼하다면서 입술을 찔끔거렸지. 각자의 시점에서 보는 세상은 나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난간에 기대어 턱을 내밀고 있는 저 사람은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지금 난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야.


마음속에 남아있는 뭔가를 밀어낸다는 건 좀처럼 잘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에 비하면 편지를 보내는 일은 너무 쉽다. 나 언제부턴가 편지를 부칠 때 내가 쓴 편지를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놓기 시작했어. 급하게 보낼 편지는 되는 대로 사진이라도 찍어두는 편이야. 어떤 편지는 보낸 뒤에 감내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그건 편지를 보낸 뒤에도 사실은 보내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싶네.

요새는 또 몇 개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어. 마지막으로 전할 말, 마지막에 지어볼 표정, 마지막에 남길 뒷모습 같은 것들도 떠올려보고 있는데 결국 다 소용없는 일이려나. 제대로 끝내고 잘 매듭짓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덜 비겁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

오늘 여기 온다고 피천득의 수필을 들고 왔는데 반도 못 읽었어. 난간의 사내는 여전히 저 멀리를 보고 있고 나는 읽는 시늉만 하느라 무릎에 올려둔 책을 이제 덮으려 해. 이 책의 <인연>이라는 꼭지에 ‘주말에 춘천에 다녀오리라’는 구절이 나오더라. 가을에 춘천이 아름다울 거라고. 그래?


당분간은 안녕이지만, 어느 해인가 나도 가을에 다시 여길 오려해. 편지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난 또 이걸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될 거고, 그때마다 생생했던 춘천 여행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너도 어느 구절에서든 잘 매듭지었길 바라. 안녕!


-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그리워서 애만 태우기 좋은 소양강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23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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