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원 May 06. 2020

처음처럼

02

2020, 가을


날이 춥다. 눈도 내리던데. 올해의 첫눈이라 감성 듬뿍 담아 구경했다. 맨발에 슬리퍼는 무리수였던 거 같다. 그렇게 오래 구경할 줄 알았으면 양말 신고 나오는 건데. 사진 한 번 찍어보겠다고 20분을 고군분투했다. 결과는 나름 괜찮았다. 2019년도의 첫눈이라고 잔뜩 의미부여를 하며 사진으로 그 순간을 남겼다. 모두에게 그리고 나에게 처음은 특별하니까 말이다. 아마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드가 없는 편.)





*


사람은 항상 처음 마음먹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패기 넘치게 외치다가도 일이 익숙해지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중에 하나는 아르바이트. 스무 살 때 시작했던 첫  PC방 아르바이트. 약 1년 반을 피시방의 아이돌로 살았다. 주말 야간 알바 걔. 그게 나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가끔 풍문이 들린다. 나를 찾는다고. (제발 잊어주라.) 어쨌든, 이 피시방에서 일했던 것도 내게는 꽤 흥미롭고 20대 초반의 좋(같)은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알바몬에서 구인 공고를 찾다가 아르바이트에 5번이나 떨어지고, 이젠 어떻게든 될 대로 돼라. 식으로 갔던 곳이 라이또였다. (피시방 이름이 라이또다. 또라이 아님.) 사장님이 피시방 아르바이트해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당당히 거짓말을 했다. 해봤다고.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안 해본 거 같다고 하셨다. 딱 보니까 그랬다고.


- 인사는 잘하냐?

- 당연히 잘하죠 사장님. 저 중학교 때 실용음악 했어요.

- 어쩌라는 거야?

- 그니까 목청 크다고요. 복식호흡 발성으로 할 수 있다고요.

- 술 마셨냐?

- 아뇨. 맨 정신인데요.

 

알았어 연락할게. 일단 면접 오느라 고생했다. 넵. 연락 주세요. 이러고 하루 뒤에 바로 연락 왔다. 그렇게 1년 반을 발 닦개로 일하게 되었지.


*


첫 출근에 손님들 텃세도 받고 내가 진짜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무슨 손님이 피시방 알바한테 텃세를 부려? 부린다. 정말 부린다. 괜히 음식 주문하고 시비 걸고. 메시지로 시비 걸고. 진짜 할렐루야다. (참고로 난 야간 12시간 알바였다. 밤 10시부터 오전 10시.) 우리 피시방에는 호스트바 선수들이 단골손님들이었는데 진짜 뒷 세계라고 해야 하나.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어디가 코성형을 잘하는 지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게 레알 TOO MUCH IMFORMATION이란 거다.


이 시절만 해도 완전 FM대로 행동했다. 김치 좀 많이 주세요. 안 돼요. 사장님이 이만큼만 주래요. 얼음 좀 주세요. 200원이에요. 다른 알바들은 그냥 주던데. 안 돼요. 돈 받으래요. 의 연속. 청소도 매뉴얼에 나와있는 대로 피곤해도 아침 7시에 흡연실 청소까지 전부 했다. 이랬던 바짝 FM이던 쪼랩 알바가 어떻게 됐냐면요. 최고참 알바가 되고 라이또 아이돌이 되었습니다.


만랩 알바가 된 나는 라이또 식구들 중 막내였다. 근데 이런 막내가 만랩 알바라 언니, 오빠들한테 꼼수란 꼼수를 다 전수했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면서 필요한 스킬, 상황별 대처. 이런 거. 꼼수 대마왕. 초심 잃은 쪼랩. 나중엔 손님들이 내 이름을 불렀다. 친하니까 막 귀찮게 굴었다.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너 알바가 그래도 되냐? 어쩌라고용.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항상 재밌는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면서 울기도 했었고, 몸도 너무 힘들었다. 밤에 출근해서 오전에 퇴근하니까 그 어두운 곳에 있다가 빛 보면 실명할 기세였다. 번호 달라고 퇴근할 때까지 기다린 사람도 있었고 쪽지부터 버거킹 와퍼 세트, 돈 주는 손님 별 손님들이 다 있었다. 사람을 참 힘들게 괴롭히더라. 어느 정도 단련되어서 엿 먹으시오. 했지만 그 시간까지 되게 오래 걸렸다. 사실 이런 나쁜 기억은 적응하는 게 좋은 건 아닌데. 참 그렇다. 뭐든 적응을 한다는 게 참 신기하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니 점점 고삐 풀리는 건 당연했다. 새로 들어오는 알바생들이 요령 없이 일을 할 땐 그게 또 나름대로 짜증 났다. 나이도 어린 게 점점 라떼는 말이야, 의 정석인 라떼가 되어 가고 있었다. 라떼는 말이야. 이런 일도 있었다고.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할 때마다 스스로 뺨을 쳤다. 꼰대들이 제일 싫다고 질색팔색을 하던 내가 어느새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내가 처음이라는 제목을 정한 이유는 다시 되새김질하고 싶어서다. 어디서든 내가 오래 있다 보면 후배들이 줄줄 들어올 텐데 내 생활에 너무 적응한 나머지 파릇한 후배님에게 라떼는 말이야, 를 시전 하면 어쩌나 해서 항상 조심하고 있다. 처음엔 모두 서툴다는 걸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하는데 어디든 오래 있다 보면 잊게 된다. 건방진 놈. 그만 건방져야겠다.





2019. 11



글을 재업로드하고 있다. 

재밌게 봐주십사. 

작가의 이전글 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