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모르는 또롱이와의 시간
2시 30분. 어김없이 새벽에 잠이 깼다. 너무 일찍 잠든 탓일까. 화장실이 마려워서 깼을까. 마음속으로는 할 일이 있어서 깼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 들렀다 식탁 위에 있던 생수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삼켰다. 입부터 목까지 시원함이 쭉~ 하고 내려간다.
어제 파전에 불닭볶음면을 배불리 먹은 탓일까.
비 오는 날엔 찌짐이지. 퇴근 전 정구지밀가루 반죽을 해두었다고 집에 가는 길에 가져가라는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퇴근하려는데 1시간 전만 해도 우산 꽂이에 있던 우산이 사라졌다.
에잇! 누가 가져간 거야!!
같이 퇴근하던 선생님께 "저 저기 밑에 주차장까지만 태워주세요." 하며 우산을 얻어 썼다. 내일 연차라는 말이 얼마나 부럽게 느껴지던지. 임신기 단축 근무를 쓰는데도 피곤하고 몸이 무거워서 그런지 계속 쉬고 싶어진다. 비가 많이 내려 이런 생각도 잠시 접어두고 후다닥 뛰어서 차에 탔다.
출발하기 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잇!!! 누가 내 우산 가져갔어. 한두 번도 아니고. 엄마가 지짐이 반죽 가져가래. 비 오는 날엔 찌짐이지. 땡고추 넣고 새우 넣고 맛있게 먹자"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 정수리만 가리고 뛰려는 순간. 어떤 아주머니 분이 우산을 씌워주셨다. "같이 쓰고 가요."
"어머나.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2분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서로의 어깨가 스치고, 눈이 마주쳤다. 분명 처음 보는 분이었다.
어디 가는지 물으셔서 102동 친정에 간다고 했더니, 쓰레기 버리고 가는 중이셨다고 했다.
눈을 마주치며 한 번이라도 만났을까. 지나쳤을까. 나는 몰라도 나를 아시는 분일까. 생각했는데 떠오르지가 않았다.
기억에 남는 건 동그란 눈동자, 눈옆에 선한 눈가주름, 까무잡잡한 피부. 나랑 키가 비슷해 눈이 자주 마주쳤다는 것.
연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며 헤어졌다.
오늘의 미션인 지짐이 반죽을 얻었고, 새 우산도 하나 얻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아무런 조건 없이 친절한 사람이다. 나도 누군가가 비를 맞고 있다면 기꺼이 한쪽 어깨가 젖더라도 우산을 씌워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냥 내 우산을 자주 내어준다. 왜냐면 비 좀 맞으면 어때? 집에 가서 샤워하면 되지. 하는 생각 때문일까. 잃어버리고도 내일 다시 돌아올 우산이기에 지금 잠시 빌려 쓰는 걸 허용한다.)
집에 도착한 후 "내가 찌짐 구워줄까?" 했더니, 오늘도 어김없이 남편이 저녁을 준비한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려 했더니, 오늘은 더 맛있게 해 준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걸쭉한 지짐이 반죽에 통통한 새우살을 넣고, 지글지글 튀기듯이 부추 찌짐을 구워낸다. 프라이팬 한판 돌리기를 묘기 부리듯이 하며 오두방정을 떨고 춤을 추는 남편.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내가 먹는 모습이 좋다는 남편. 아무래도 나는 결혼을 잘한 것 같다. 도영이와 뱃속에 있을 또롱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러한 아빠의 사랑을 알고 있을 거다. 엄마가 느끼는 감동, 감사, 즐거움, 행복을 아가들은 2천 배 2만 배를 느끼지 않을까?
입덧으로 김치, 오이고추, 샐러드를 찾는 나는. 찌짐에 오이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었다. 노릇노릇한 지짐이 바삭바삭한 식감. 그러면서도 느끼함이 위를 지나 통과할 즘. 남편이 비장의 무기인 불닭볶음면을 요리했다. 맵찔이라 불닭볶음면을 잘 먹을 줄 모르면서 도전이라니.
임신 후 매운 게 당기는 나를 위해 준비했단다.
느끼해져서 젓가락을 내려놓을 즘 불닭볶음면이 완성됐다. 평소 라면도 불닭볶음면도 안 먹는 내가. 젓가락으로 휘휘 면을 막대사탕처럼 말아 한입에 쏙 하고 먹었다. 혀에 닿는 느낌이 '오! 이게 이렇게 맛있었나?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맛' 젓가락을 부르는 맛이었다.
남편은 모를 거다. 뱃속 아가가 불닭볶음면을 어떻게 느끼는지. 정말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느끼해서 그랬던 건지. 폭죽이 터지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맛이었다. 또롱이 너도 처음이지? 땡고추와는 다른 이맛.
매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아기가 아토피가 생긴다는 말이 있던데. 미안하면서도 엄마가 좋아하는 걸, 같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새벽에 글을 쓰며 아빠는 모르는 시간을 또롱이와 함께 보내고 있다. 임신한 엄마만이 누릴 수 있는 시간. 스탠드 불을 은은하게 켜두고 휴대폰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읽는 책, 내가 하는 생각, 점심 산책하며 느끼는 햇살, 또롱이는 알고 있겠지. 느끼고 있겠지.
입덧을 핑계로 입맛도 달라지고, 생활패턴도 달라진 나. 자는 시간만큼 깨어있는 시간도 또롱이와 함께 느끼고 즐기고 싶다.
배꼽 아래에 주먹 크기만큼 단단한 게 만져진다. 골반과 골반사이. 내 몸의 중심에 또롱이가 있다.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모니터링이라도 하듯이 느낄 아기.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때로는 변덕스럽고, 자극적인 음식만 먹는 게 아닌가 미안한 마음도 든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늘은 밀가루 파티를 했다. 배를 쓰다듬으며 "비 맞게 해서 미안해. 밀가루를 많이 먹어서 미안해. 매운 거 먹고 괜찮니?" 말을 걸어본다. 또롱이도 답을 해준다. "비를 맞고 느껴보는 것도 좋았어요. 우산 씌워준 고마운 분도 만났잖아요. 오늘은 입덧도 안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북 치고 장구치고 하는 엄마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