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왠지 자꾸 ‘늙음’에 대해 읽혔다.
어릴 적 자주 듣던 ‘익숙한 새벽 3시’를 부른 가수 오지은의 책이다. 그녀는 이제 마흔이 넘는 어른이 되었고 그 노래를 듣던 나도 이제 곧 서른을 앞두고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이 느껴져서일까 작가의 의도일까. 나는 왠지 이 책을 읽으며 ’늙음‘에 대한 고민하게 됐다.
선생님은 왜 이 마을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럼 결국 뻔한 것 아닌가요? 왜 나한테 그렇게 쉽게 모험을 강요하죠?” 조숙한 아이들은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이건 직업이지, 내킬 때마다 재미있는 만큼만 하는 놀이가 아니라고!
나는 개미도 베짱이도 아닌,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힘껏,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계속하는 사람.
나는 감격했을까. 기쁨으로 몸이 가득 찼을까. 생의 최고의 순간을 보냈을까. 현실은 어떠했냐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훅 하고 지나가버렸다.
“다음은 뭔가요!” 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다. 도로테아는 차분하게 대답한다. “그냥 다음 날도 하는 거야. 또 다음 날도. 계속.”
“너무 슬프잖아. 이런 결론이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흘러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너무 슬프잖아.”
늙는다는 건 흥분이 가라앉고 이내 진부해진 일상이 반복되는 과정이고, 모두 그렇게 늙게 되어있다. 늙으면 반복되던 기왕의 삶이 더 부질없어진다. 잠깐의 성과와 짧은 승진의 기쁨을 양분 삼아 겨우겨우 쌓아온 커리어는 a4 몇 장의 서류로나 남을까 싶고, 몸은 쇠약해지고 내면은 허약해진다. 보통 시니컬해지고 종종 우울해지면서 젊음을 부러워할 것이다. 아마 나도.
뾰족한 수는 없다. 내 그릇만큼의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대단한 말을 할 수도 없다. 버티면 괜찮아진다는 거짓말도 할 수 없어서 격려도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하기 싫은 말은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인생은 복잡하고 입장은 다양하고 혐오는 뿌리 깊고 나의 내면은 허약하다.
그리고 그 늙음에 대해 우린 대처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부질없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 남아도, 마땅히 묘책이 없다. 세상이 원래 그런가 보다 싶다. 그냥 앞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대충 돈이나 벌며 시간만 때우며 노는 게 더 낫겠네, 이런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단순한 걸 원하고 나의 내면은 역시 쉽게 여려진다.
흔들리고, 고민하고, 때때로 무너져도, 계속 달려가는 사람.
희망이 아주 작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막을 계속 걷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이 없음을 알아도 계속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늙음을 받아들이는 일일 것 같다. 언젠가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을 알지만서도 계속 달려가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무너지더라도, 잠시 쉬고 다시 갈 길을 가는 것. 그게 그나마 잘 늙는 길이 아닐까.
오지은의 ‘마음의 하는 일’을 읽으며 늙는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은 사그라든 기분이 들었다. 쇠약해질 몸과 부질없는 과거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것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 생각에 지금의 내가 나태해지거나 현실도피에 빠질 것이 무서웠다. 생각을 바꿔야 했다. 희망 없는 사막을 걸어가는 이들은 무슨 마음가짐으로 그 길을 걸을까. 그들은 그 길에서 어떤 가치를 찾았나. 나도 생각을 바꿔야 했다. 늙음을 받아들이고 현재와 분리해서 생각하자. 부질없을 걸 알아도 나는 하던 일을 마저 할 것이다. 젊음이 과정이고 늙음이 결과라면, 과정이 가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결과가 과연 부질없기만 하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