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다음 연도 사업 승인을 받기 위한 보고서를 2주 안에 제출해야하기 때문이다. 큰 그림의 큰 그림은 지난 기수 애자일 팀이 3개월 동안 공들여 작성해 놓았고, 이번에는 그중에서 우리 파트에 해당하는 부분만 팀장님 짜 주신 스토리라인 아래 다시 작성하는 작업을 한다. 팀원 모두가 저마다 책임지고 작성해야 할 몫을 할당 받았다. 이 보고서의 서론만 벌써 세 페이지인 것도 놀랍지만 제품 개발 로드맵 작성을 내가 맡게 된 건 더욱 놀라 자빠질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세 가지 프로젝트 전체를 꿰뚫어 볼 만한 깜냥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A 프로젝트만 맡았을 뿐이고 P.O.도 아닌 팀원이다. B와 C 프로젝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연히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디자인팀, 플랫폼 사업팀, 마케팅팀 모두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하고 작성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바쁜 사수들에게 일일이 물어봐 가며 쓸 수 없어, 대리 나부랭이가 고구마 백 개 먹은 기분으로 작성한 로드맵. 과연 이게 쓸모가 있을까 싶어 물어보면 ‘자세한 건 나중에 수정한다’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은 했지만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쩐지 찝찝한 마음으로 퇴근해 서평이나 쓰자며 책을 열었는데. 아뿔싸, 나는 가라 스케줄이고 뭐고 제일 중요한 걸 빼먹고 말았다. <인스파이어드>에서는 로드맵 작성 시 제품 출시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이 목표로 하는 실제 비즈니스 성과를 꼭 상기시키라고 말한다.
만약에 당신이 페이팔을 결제 수단으로 추가하는 기능에 대한 과제를 하고 있고, 그 목표가 전환율을 높이는 것이라면 현재의 전환율과 달성을 기대하는 전환율을 항상 함께 보여 주어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능이 실제 출시된 후에는 전환율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인스파이어드>, p.337
예시! 예시라도 좀 다오!!!! (출처: 나)
문제는 또 있다
사실 이건 우리 콘텐츠 개발센터의 소망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 있어 하는 만큼 소비자도 관심 있어 할까? 자기 새끼는 무조건 예쁘지만, 남의 자식 예쁜지는 잘 모르는 법이다. 게다가 우리 센터에는 콘텐츠 기획자만 거의 7~80명이 한 공간에 앉아 있다. 출판사로 치면 편집자들이다. 사업 승인이 나서 자금이 생겨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협업해야 하는 다른 부서 사람들과는 약속을 잡고, 회의실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만나러 다녀야 한다. 그러니까 콘텐츠 개발센터, 디자인 팀, 기술 팀, 마케팅 팀이 자기들끼리 꽉꽉 뭉쳐 한 공간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A, B, C별로 모여 앉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심지어는 프로젝트 A의 팀원끼리도 흩어져 앉아 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를 꼽자면 누구를 만나도 디자인, 기술, 콘텐츠, 마케팅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할 제품 관리자가 없다는 것이다. 팀장님이 계시지만 역할은 같지 않다. <인스파이어드>에서 제품 관리자는 고객, 데이터, 비즈니스, 시장과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팀장님은 프로젝트 A~C를 진행하는 우리 팀, 프로젝트 갑을병정을 진행하는 옆팀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A~C와 갑을병정은 아주 넓은 범주에서 비슷한 성격일 뿐 완벽하게 서로 다른 일이다. 우리 제품에 특화된 분은 아닌 것이다. 회사에서 제품 관리자를 고용해 줄까? 연봉이 그만큼 더 나가는데. 모를 일이다. 사업 승인이 떨어진 후 우리 팀장님, 마케팅, 디자인, 기술 관리자가 서로서로 단짝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책에서는 제품관리자와 나머지 셋이 제품 발견이라는 출발점에서 같이 시작했느냐도 매우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이 점은 단순히 나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소 아쉬웠다.
사이좋게! 용병이 아닌 미션팀으로 일하라!
솔직히 말하면 중소기업, 혹은 강소기업의 사장 쯤 되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꽤 많이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사장이라면' 적어도 어떤 사람들을 얼만큼 고용해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게 해야 하는지 참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전체적으로 무디고 디테일이 부족한 책이었다. 아무래도 내 경험이나 주인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가 답답한 상황들을 바꿔 나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이런 의사 결정 체계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미칠 수 있게 되면 그 때 조심스럽게 건의해 보고 싶다. 우리 처음부터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